<우닝워켄>
(1)
꽃집 아주머니가 옆구리를 찌르며 새된 소리로 웃는 것을 다 당해주고야 겨우 붉은 장미 한 다발을 손에 들 수 있었다. 막상 탐스러운 꽃송이의 고혹적인 자태를 보니 너무 과한 선택이었나 하는 고민도 들었지만, 이 정도는 되어야 그 목석 같은 사내도 무언가 낌새를 채고 느끼는 바가 있겠거니 싶어 그냥 만족하기로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와 무척 잘 어울릴 것 같았다. 희고 가는 손마디가 장미 줄기를 휘어 감는 모습을 생각 하니 얼굴에 묘하게 열기가 올랐다. 이게 다 뭐야 남우세스럽게, 괜히 손부채질을 하면서 발걸음만은 재게 놀렸다.
"웬 꽃이지?"
"거 꽃집 아줌마가 장사가 그렇게 안된다지 뭐야. 같이 먹고 사는 입장이니 인심쓰기는 했는데, 글쎄. 들고 집에 들어가기도 마땅치 않고. 어차피 오는 김에, 그러니까."
허둥거리는 듯한 말투에 패배감까지 든다. 선물이라 하면 간단할 것을 왜 굳이 구차한 꼬락서니로 위장하느냔 말이다. 내 두서없는 말을 듣던 워켄은 의아쩍은 얼굴로, 선뜻 꽃을 받아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는 결국 체념하였다.
"빈 손으로 오는 것보단 낫잖나."
"사내와의 약속에는 빈 손보다 못한 센스가 아닌가 싶은데."
"-그래, 인정한다고. 지당하신 말씀이야 닥터. 사과의 뜻으로 이건 그냥 내 집에 버리기로 하지."
나는 결국 툴툴대며, 시장을 세 바퀴쯤 돌고서야 간신히 용기를 내어 살 수 있었던 장미 꽃다발을 대강 내팽개치려 하였다. 그때, 불쑥 튀어나온 워켄의 손이 꽃다발을 부드럽게 잡아채었다. 상상했던 대로 꽃을 휘감는, 가늘고 긴 손가락에 하마터면 다시 얼굴을 붉힐 뻔 했다. 그런 아찔한 순간을 미처 짐작하지 못했을 워켄이, 그로서는 드물게도 밝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는 꽃다발에 코끝을 묻으며 빙그레 미소짓고는 말했다.
"고마워. 그녀와 잘 어울릴 것 같군."
나는 그만 실없이 웃어버렸다. 연적이라 말하기에는 자그맣기 짝이 없는 그 아가씨에게 분개하느니 무심하기 짝이 없는 이 사내 탓을 하는 게 나을 터였다.
(2)
"어때, 공부는 좀 할만 한가?"
브라우닝의 살가운 인삿말에 워켄이 고개를 돌렸다. 워켄과 마주하게 된 브라우닝은 실소를 터뜨렸다. 워켄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운 일이야 잦다 싶을 정도이니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늘 워켄이 들고 있는 책은 평소와 같은 복잡한 연구서가 아니라 조그마한 시집이었다. 그러나 워켄은 여느 때보다도 진중하고 심각한 얼굴로 시집을 탐독하고 있었다. 며칠전 그에게 시집을 쥐어준 장본인인 브라우닝은, 워켄의 피로한 얼굴에 불필요할 정도의 즐거움을 느꼈다.
"거보라고, 내가 말한 대로지? 세계고 삶이고 멀리서 어렵게 찾을 필요 있나."
"이건..."
워켄은 항의하듯 말을 꺼냈다가 끝을 흐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렵군."
브라우닝은 마침내 항복선언을 들은 기분을 느끼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겼다!
...
"연구가 좀처럼 진전되질 않는군..."
그래, 그래서 귀한 몸께서 납시었군. 브라우닝은 툴툴대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워켄은 잡동사니가 널린 브라우닝의 사무실을 둘러보다가, 탁자 위에 펼쳐진 채 놓여 있는 한 권의 책에 시선을 고정했다.
"자네가 책을 읽다니 별 일이군."
브라우닝은 워켄의 무심한 말에 당장 발끈했다.
"뭐야, 그 터무니 없는 소리는? 내 취미가 독서라고."
잡지나 추리소설이 대부분이지만.
"시집을 특히 좋아하지!"
노인네가 돈 없다며 사례금대신 던져준 것이긴 하지만.
"시집엔 모든 것이 있어. 인간과, 삶과, 죽음, 사랑, 이 세상의 진리랄 것이 다 들어있다고."
"진리?"
워켄은 미심쩍은 얼굴이었다. 그래, 그런 거창한 단어가 아니면 반응을 안하지 당신이란 작자는. 브라우닝은 과장된 몸짓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하기야 자네가 뭘 알겠나. 숫자랑 기호에만 매달려 답을 찾는 자네가 시집의 미학같은 고상한 것을 이해할 리가 없지."
워켄은 입을 꾹 다물고 답이 없었다. 조금 과했던가, 하고 브라우닝이 우려를 할 무렵 워켄이 시집을 집어들었다.
"빌려가지."
짤막한 그 한 마디를 끝으로 워켄은 별 인사도 없이 사라졌다. 그 후로 워켄의 연구실에서는- 아마 이례 없는 일일 터였다-별과 바람과 무지개와 파도에 대한 대대적인 연구가 진행된 모양이었다. 워켄의 얼굴에는 패배감 비슷한 것이 떠올라 있었다.
"아니, 분석 말고 감상. 자네가 느낀 것."
"감상이랄 건...글쎄 공감하기가 어렵더군."
어련하시겠어.
"하지만..."
"하지만?"
워켄의 얼굴이 사뭇 부드러워졌다.
"내 아이들에게는 한번 읽어주고싶군."
"...그거면 된 거야, 닥터. 나참. "
"됐다? 이게 진리라도 된단 말인가?"
"그럴 수도 있지 않겠나. 모르는 거니까."
"흠..."
"이번 연구도 성공적인 것 같구만."
아주 사랑넘치는 애아빠의 얼굴이군. 쳇, 아무래도 괜한 짓을 했어. 브라우닝은 씁쓸한 기분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3)
(만취우닝)
"아 그래 댁이 고스로리 취향인 건 알았고 나한테 승산이란건 없지마안흐아아"
"이봐 자꾸 허튼소리 징징댈 거면 나가!;;" (농담)
브라우닝은 소파에 편히 널브러진 채로 워켄의 연구실을 흘끔거렸다. 작은 스탠드 불빛에 의지해 두꺼운 연구서를 뒤적거리던 워켄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는 모습이 보였다. 잘 안 풀리나 보지, 브라우닝은 작게 웅얼거렸을 뿐 더이상 목소리를 높이진 않았다. 이 이상 연구를 방해했다가는 당장 거리로 쫓겨날 지도 몰랐다. 브라우닝이 거나하게 취해 처음으로 워켄의 집을 찾아왔을 때, 워켄은 지금과 같이 미간을 찌푸렸지만 뜻밖에도 거실의 소파를 내주었다. 그러나 그것 뿐이었다. 물수발을 들어주거나 더이상 살가운 배려는 없었다. 물론 브라우닝은 내쫓기지 않은 사실만도 놀라웠으므로 그 이상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가끔, 워켄의 소파를 차지하고 누워 책장이 펄럭이는 소리와 펜이 종이를 갉작이는 소리를 듣고는 했다. 아무튼 술냄새를 참아줄 만큼의 존재는 된다는 거군, 그야말로 감격적인데 그래. 브라우닝은 저 자신이 그어놓은 철저한 선-워켄을 화나게 하지 않을-에 따라 소리를 죽이며 큭큭 웃었다. 그 순간, 책에 몰두하던 워켄이 브라우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크, 브라우닝은 급히 눈꺼풀을 내렸지만 아무래도 뒤늦은 대처였다. 워켄은 몸을 일으켰고, 브라우닝은 눈을 꼭 감은 채 느릿하게 숨을 쉬려 애썼다. 발걸음이 서서히 가까워지다가, 멎었다. 작게 소음이 일었다. 워켄은 맞은편 의자에 몸을 앉힌 듯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지루한 정적이 흘렀다. 브라우닝은 실눈을 뜨고 싶은 유혹에 시달렸다. 뭐야, 보고 있는 건가? 서로 눈이 마주쳤을 때 마땅한 대처를 할 엄두가 안 났으므로 그는 유혹을 애써 참아냈다. 희미하게, 한숨을 흘리는 소리가 났다.
(4)
"담배는 밖에 나가서 피워, 브라우닝. 내가 담배냄새 질색하는 줄을 알면서 굳이 그러는군."
"밖에 춥다구. 마지막으로 나간게 언제지? 겨울이 온 줄이나 아나? 또 한참 틀어박혀서 연구만 했을 테지. 나가서 빛좀 쬐라고, 워켄. 얼굴은 희멀건해서 말이야."
(5)
베개와 침대 대신 책상과 서류더미에 몸을 맡기는 것으로 나름대로 아쉬운 타협을 한 모양이었다. 팔에 반쯤 묻힌 얼굴에서 숨소리가 희미하게 새어나왔다. 잠이 들어서야 어느 정도 피로가 걷힌 그 얼굴을, 브라우닝은 잠시동안 묵묵히 바라보았다. 본래 하얀 피부에 근래에는 병색까지 드리워져 워켄의 얼굴은 가히 창백했다. 창가로 새어드는 달빛을 함뿍 빨아들인 얼굴이 흰 그릇처럼 매끈하게 빛났다. 제멋대로 흩어진 긴 머리칼이 그 위에 신비한 문양처럼 그어져 있었다. 브라우닝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얼굴을 가린 머리칼을 걷어주었다. 그는 바로 물러날 셈이었지만, 온전히 드러난 워켄의 얼굴을 보며 움직이기를 멈추었다. 손에 닿은 뺨은, 상상했던 것과 같이 서늘했다. 아름답다,고 브라우닝은 생각했다. 사내에게 이런 수식을 붙였다는 데에 떨떠름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으나, 그래도 제 생각에 수긍하기로 했다. 애초에 사내-아니, 인간이라 생각되지 않는 모습에까지 일반적인 기준을 내세울 필요는 없을 터였다. 그래, 이것은 차라리...흡사 '인형'과 같지 않은가. 순간 그는 움찔하고 몸을 굳혔다. 미미했으나 분명한 진동은, 손에 닿아 있던 워켄에게도 전달되었다. 감긴 눈이 천천히 벌어졌다. 눈의 초점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빨리 돌아왔다. 자수정 색을 띤 눈동자가 무감동하게 브라우닝의 상을 담아내었다. 브라우닝은 그 시선에 태평하게 대꾸하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한숨이 새어나왔다.
(6)
브라우닝은 흘끔 워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열기도 알맞게 올라오고 있지만 내리깐 시선에서 별다른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조소했다. 워켄에게 이건 뭐지? 생식행위? 거, 생식이 될 리도 없으니 이건 그러니까 아주 비효율적이고 멍청한 행위겠군. 근데 왜 응하는 거지? 여기에 당신이 찾던 예의 그 진실이라는게 있나? 진실, 잘난 진실. 세계. 내가 그딴 거창한 답을 줄 수 있을 턱이 있나? 빌어먹을. 브라우닝의 손길은 좀 거칠어졌고, 거기에 맞춰 워켄은 짧게 비명을 올린 후 눈살을 찌푸렸다. 브라우닝은 그 모습을 보며 소리내어 웃었다. 적어도 이건 더없이 명백해, 워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7)
이젠 꿈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워켄에게 있어 그런 모호함과 불확실성은 드물고도 불쾌한 감각이었다. 그러나 매일 깊은 밤에 어김없이 찾아드는 사내의 존재는, 현실이라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몽롱했다. 망가졌기 때문인가. 망가진건 누구인가. 그는 흡사 기계처럼 단조롭게 매일밤 비슷한 밀어를 속삭였다. 그러나 그 말에 스며있는 절박함은 결코 기계와 같지 않았다. 살아있는 말이었다. 감정의 말이었다. 워켄은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단단하게 손목을 붙잡혀 귀를 틀어막을 수도 없었다. 기계라면 작동을 멈추면 된다. 그리고 수리하면 된다. 그러나 인간은 그럴 수 없었다. 기계와 비할 바가 없이 이토록 나약했다. 거의 정신을 잃다시피 잠든 브라우닝의 목에 손을 가져갔다가, 차분히 뛰고 있는 맥박에 흠칫 놀라 이내 거두기도 했다.
브라우닝의 팔목에 주사를 꽂아넣으며 워켄이 나직이 말했다. 그만둬. 더이상은 나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 브라우닝은 희미하게 웃었다. 다른 처방은 생각해 본 적 없나, 닥터? 워켄은 입술을 깨물었다. 치욕적인 무력감이, 온 몸을 감쌌다.
브라우닝은 언제나 밤을 틈타 찾아들었다. 그래서 대낮의 햇볕을 묻히고 들어온 그의 모습은-설핏 잠이 든 한낮의 꿈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어렴풋 하기만 했다. 워켄은 결국 또 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꿈이 아니었던가. 브라우닝이 미소지었다. 오늘밤에는 오지 않을 거야. 그래서 지금 왔어. 워켄은 차마 입을 뗄 수 없었다. 다행이라고 안도할 수도, 사라지라고 패악스럽게 고함칠 수도 없었다. 그는 브라우닝의 거뭇한 눈가를 바라보며 조금 입술을 떨었다. 할 수 있는 건, 끝내, 아무 것도. 워켄은 그 후로 밤에 남겨졌다. 꿈은 꾸지 않았다. 오로지 혼자였다. 중단된 연구에도 손을 댈 수 없었다. 인형을 고치고 만들고 부수고, 할 수 없었다. 더이상 아름답다는 말도 사랑한다는 말도 그런 숨막히는 불완전함은 없이, 명료한 현실만이 남았다.
(8)
"당신도 나를 알고 있나? 하나같이, 나는 알지도 못하는 나를 안다고 말하는군... 타인에게만 기억되는 것은 불쾌한 일이야."
"잊혀지는 것도 유쾌한 일은 아니지."
"......"
...
"이제와서 시치미를 뗄 셈인가...?"
브라우닝은 워켄의 얼굴을 붙잡아 시선을 고정시키며 말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워켄은 잠시 당황했다가 이내 노기를 띤 얼굴로 브라우닝의 손을 쳐냈다. 브라우닝은 붉어진 손을 거두고 생각에 잠겼다. 반응은 워켄이 맞는데. 그리고 나를 기억 못한다는 것도 사실이군. 하기야 별반...달라질 것도 없나.
"뭘 알고 있지? 나에 대해 뭘 기억하고 있나."
워켄은 전혀 누그러진 기색 없이 딱딱하게 말했다. 브라우닝은 대답하는 대신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웠다고는, 어차피 말할 수도 없는 처지였지.
"뭐 피차 기억이 없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부분이 다를 뿐이지. 별 것 없으니 신경쓰지 말게. 실례했군."
브라우닝은 모자를 집어들고 몸을 돌렸다. 어차피, 달라질 것은 없었다. 오히려 잘 된 것일 수도.
(9)
워켄은 망연하게, 작업대 위에 올려놓은 사내를 바라보았다. 작업대, 그리고, 재료. 불현듯 섬뜩한 어감에 몸이 떨렸다. 지겹도록 봐왔으므로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으나 이번만은 달랐다. 공포? 가당키나 한가. 제 손으로 죽인-죽였을-인간은 몇이며, 남이 가져다준 시체는 또 얼마던가. 시체와 둘만 마주한 상황이 그에게 이제야 공포며 죄악감 따위를 불러일으켰다고 하면 그 또한 유머일 터였다. 하지만 공포가 아니라면 이 떨림은 무엇일까. 사내는 대강 핏자국을 닦아낸 탓에 창백한 얼굴만 더욱 두드러졌다. 항상 그래왔듯이 이 사내 또힌 인형으로 만든다면. 그러나, 왜? 아무도 의뢰하지 않았고 제 자신의 실험도 그리 부족하지 않은 상황에서 그런 비효율적인 짓을 뭐하러? 지금껏 인형을 만든 건 그런 이유를 벗어나지 않았다. 한 번도, 이런 식으로, 인간의 죽음을 부정하고, 되살리기 위해서가, 워켄은 생각을 멈췄다. 되살린다,고? 오토마타가 인간의 부활이란 말인가? 지금껏 창조해 왔으나 그건 부활이 아니었다. 그렇다, 아무리 정교하게 만들어도 그건 인형일 뿐이다. 인형에 지나지 않는다. 문득, 믿어지지 않을 만큼 생경한 감각이 온몸을 에워쌌다. 뺨을 타고 물기가 흘렀다. 이미 고대에 사라져 버린 어떤 흔적처럼, 위태롭고 아득하게. 워켄은 눈물이 고인 채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인간의 형상을 한 이들은, 아무런 표정 없는 얼굴로 그를 바라볼 뿐, 아무도 그와 함께 울어주지 않았다. 워켄은 걷잡을 수 없이 떨리는 몸을 추스르지 못하고, 사내의 주검 앞에서,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오열했다.
<쌍둥이>
(1)
...갑작스레 느껴진 기척에 느긋한 인사를 건네려던 아치볼드는 상대의 얼굴을 보고 순간 헛숨을 집어삼켰다. 형편없이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등장한 베른하드는 핏발 선 눈으로 주위를 홱 둘러보았다. 웬만해서 냉정을 잃지 않는, 오랜 전우의 침착한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에, 아치볼드는 미처 대비랄 것을 하지 못했다. 그는 베른하드의 억센 손아귀가 지시자의 팔목을 낚아채는 꼴을 하릴없이 보고만 있었다. "베른하드, 갑자기 무슨" 황급히 입을 연 아치볼드는 지시자의 팔목에 묻어난 선혈을 보고 다시금 숨을 들이켰다. 베른하드는 제 허리께에 오는 작은 소녀의 팔목을 쥔 채 흡싸 씹어뱉는 투로 말했다.
"분명 내가 싸우겠다고 했다. 왜 그를 내보냈지?"
아치볼드는 대명사로 모호하게 지칭된 이를 분명하게 추리해 볼 수 있었다. 더불어 베른하드의 손에 묻은, 지시자의 팔에 범벅된 피의 주인 또한 같은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 -프리드리히. 생각이 거기에 미치고야 아치볼드는 뒤늦게 지시자와 베른하드 사이에 끼어들 수 있었다.
"진정하게, 베른하드. 지시자 탓이 아니야. 이 아가씨는 다만 프리드리히의 요구를 존중했을 뿐이지."
금세 베른하드의 날선 시선이 아치볼드에게 옮겨졌다.
"그래-나도 공범이라 이 말이지, 아주 벨 기세로군. ...그래서,라고 말하면 새겨듣겠나?"
아치볼드는 베른하드의 눈에 시선을 맞추고 딱딱하게 말했다. 더 모질게 말할 수도 있었네, 나도 잘 참은 거라고. 아치볼드는 생각을 정리하고 천천히 말했다.
"요즘 자네가 무리를 한다더군. 전투에 온 몸을 던지면서. 마치...죽어버릴 기세로 말이야."
망자의 세상에 던져진 아이러니에, 웃음을 터뜨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이번엔 반드시 지키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것 뿐인데."
흡사 물 속에서 숨을 토해내듯, 힘겹고 괴로운 소리가 났다. 프리드리히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가볍게 닿아 있던 형제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엉키듯이 붙드는 거친 손이 서글펐다.
(2)
"듣기로는 아주 사납고, 어둡고, 위험한 기운을 풍기는 검사라고 해요. 아무리 당신이라도 각오를 해두어야 할지 몰라요, 프리드리히."
프리드리히는 제 얼굴에 난 상처를 손 끝으로 무심히 쓸어내렸다. 그는 진지하게 고개를 주억거리기는 했으나, 그다지 긴장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여전히 사람 좋아보이는 웃음을 띤 채 귀만 열어 지시자의 경고를 경청하였다.
"그래, 주의할게. 흠-아니야, 들뜬 게 아니야. 그럴 리가. 그렇지만 호기심은 생기는데. 어쨌든 마물이 아니고 사람인데다...강한 적수라니까."
...
갑작스럽게 닥쳐온 습격에 프리드리히가 정확히 검을 내지를 수 있었던 것은 검사로서의 오랜 감각 덕분이었다. 판단은 그 다음이었다. 우선 적의 검을 막아낸 다음 그는 뒤늦게 상황을 파악했다. 지시자는 무사하다, 자신도 다치지 않았다. 상대는 장검을 사용하는 타입이고, 상당히 강하다. 검술은 복잡하지만 파악할 수 있다. 왜냐면...? 순간 프리드리히는 눈을 크게 떴다. 강한 도약 탓에 일어났던 흙먼지가 차츰 가라앉으며 상대의 모습도 드러났다. 날카롭게 쏘아보는, 녹색 눈동자가 눈에 들어왔다. 저와 닮은 눈동자를 잠깐 바라보고, 보다 큰 윤곽을 파악하여, 마침내 프리드리히는 머릿속에 뚜렷한 상을 하나 완성시킬 수 있었다. 두번째 공격이 닥쳐오기 직전에, 그는 자신이 도출해 낸 답을 소리내어 외쳤다. "베른하드?" -상대의 걸음이 멎었다.
...
"베른하드."
"증오스럽다."
프리드리히는 되물으려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증오라는 말이 주위의 공기를 짓눌렀다. 그는 장난스럽게 손을 내저어보려다 베른하드의 찡그린 얼굴을 보고 다만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엇이?"
베른하드는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말하기 어려운가 싶어 프리드리히는 잠자코 기다렸다. 증오의 대상이라, 짐작할 만한 건-
"...모르겠다."
"어?" 그는 상상하지 못한 답에 얼빠진 소리로 되묻고 말했다.
"뭐야, 베른 답지 않은 소릴"
"눈을 떴을 때 남은 것은 막연한 증오 뿐이었다. 증오와...기억나지 않는 과거만이...이 세계에서 가진 전부였다. 그렇게, 혼자더군. 무엇이 증오스러운지 알 수 없었다. ...나를 죽인 자인가? 아니면"
프리드리히는 차가워진 자신의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저도 모르게 형의 시선을 피했다.
(3)
"아아, 저승이라는 건가? 생각보다 근사하지는 않네. 뭐 대단한게 있지도 않고...솔직한 마음으로, 좀 싱거워. 앞으로 심심하겠는데. 응? 아냐, 어휴. 저승이라며. 누굴 보길 바라 혼자 외로운 게 낫지. 하하, 다들 실컷 장수하다 왔으면."
"나 혼자 그런 생각을 했거든. 베른이 다 늙어서 여기 오면, 나는 과연 베른을 알아볼 수 있을까 하고 말야. 사실 자신 있었어. 그래도 쌍둥이인걸. 한참 기다리려 했지. 즐거운 마음으로. 무척 오래 걸린다 해도...정말로 괜찮았을거야."
"...보고싶다고 생각하는게 아니었는데."
"그냥, 굳이 기억을 찾을 필요가 있을까? 이 세계도 그리 나쁘지는 않고. 무엇보다 이렇게 다시 만났잖아. 그냥 이대로-"
"적어도 본래의 너는 절대 그렇게 말할 리가 없지, 프리드리히."
프리드리히는 입을 다물었다. 베른하드는 동생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무엇을 보았지? 너에게,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프리드리히는 애써 담담한 얼굴을 지어보였다. 입을 여는 순간, 손쓸 새도 없이 울음이 터져나올 것만 같았다. 자신의 비참한 죽음 때문이 아니었다. 홀로 남겨진 채, 어찌할 바 없이 슬퍼하고 분노하고 증오했던, 유일한 혈육, 누구보다도 진한 유대로 이어져 온 쌍둥이 형 때문이었다.
(4)
"프리드리히가 풀이 많이 죽었더군. 뭐 나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니 할 말도 없고 형제 싸움에 끼어들 생각도 없지만. 그래도 너무했어. 정 떼려는 것 같았다고. 왜그러나?"
"비슷할지도 모르지."
"비슷하다?"
"여긴 군대야. 해오던 대로 어리광을 다 받아줄 수는 없어."
"흐음. 꼭 그렇게 생각해야 하나? 군대라서 혈육끼리 더 의지하고 하는 거지."
"공사를 구분 못해 위험에 빠지느니 가족이길 포기하는게 낫다."
"베른하드."
"자네 입으로 그랬지. 잘 알지도 못하고 형제싸움에 끼어들 생각도 없다고. 그러니 이쯤해둬. 나도 더 설명하고 납득시킬 생각 없다."
"...그래, 참견은 그만두지. 하지만 좀더 솔직해지는 편이 좋을거야. 애정을 헛된 감상과 나약함으로 매도하지마. 이건 아끼는 전우에게 하는 진심 어린 충고라고."
내가 위험에 빠졌다는 소식 하나에 프리드리히는 명령을 어기고 현장을 이탈해 내게로 왔다. 벌 자체도 중했지만, 그보다도 자칫 둘다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한없이 무모하고 어리석었다. 내 앞을 막아서는 그를 보며 불쾌하리만큼 심장이 뛰었다. 냉정해져야 한다, 한낱 감상에 사로잡혀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그것이 우리가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 후로 나는 프리드리히에게 거리를 두었다. 레지먼트 입대 초반 무렵에, 전우들의 시체에 묻혀 한나절을 보내고 내 방에 찾아와 내 품 안에 안겨서 하염없이 울었던 그였지만, 거리를 두기 시작한 이후로는 서서히 사적으로 나를 찾는 일이 줄어들었다. 그렇게 십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우리는 이제 나름대로 요령 있게 거리를 유지했고, 공사를 구분했다. 그가 나를 따로 찾아와 붙든 것은, 그러므로 매우 간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베른, 오늘밤에 같이 자지 않을래?"
"무슨 소리야?"
"간만에, 음, 긴장되어서 잠도 잘 안 올 것 같은데 둘이면 좀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우리 이야기 나눈지도 오래됐잖아."
"이야기는 항상 나누고 있어."
"그런 거 말고! 개인적인 이야기 말야. 그러니까."
"프리드리히. 이런 불필요한 소리를 할 시간에 무기나 더 점검해라. 목숨이 걸린 전투야. 긴장 풀지 마."
"그런 것쯤은 나도 알아. 잘 안다고."
"그럼 구태여 말할 필요가"
"죽을 수도 있어!"
"...프리드리히. 어느 전투나 목숨을 걸긴 마찬가지다. 내일 전투만이 위험한게 아니야. 지금껏 잘해왔다. 괜한 불안을 경계해라."
"...알았어. 미안해, 괜히 심란하게 해서. 신경쓰지 마. 네 말마따나 어리광이었어. 약한 소리."
"이해한다. ...그럼 대신, 돌아오는 날 한잔 하고 같이 자면 어떨까."
"정말?!"
"그래. "
"좋아! 그 말 절대 무르기 없기야! 기대된다!"
"나 베른한테 꼭 하고 싶은 말 있거든."
"뭐지?"
"비밀. 그날 알려줄거야."
프리드리히의 쓸쓸한 얼굴에 무심코 던진 말이었다. 그래도 간만에 밝아진 그의 표정이 나쁘지는 않았다. 이번 전투를 무사히 마친다면, 그 정도의 휴식은 가져도 될 테지
...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 프리드리히를 떠올렸다. 어느 순간부터 나를 보고 머뭇거리기만 했던, 외로운 표정을 지었던, 나와는 너무도 다른 상냥한 쌍둥이 동생. 내가 밀어냈다. 마지막으로 무슨 말을 나누었더라. 돌아오면, 같이, 해줄 말이, 꼭 해줄 말이-고작, 고작...고작 그것이...마지막으로 들은 그의 말인가. 더 나은 말을 할 수도 있었다 고맙다 좋다 사랑한다 그런데 내가 밀어냈다. 그를 밀어내고 십년을 지냈다. 그에겐 나 뿐이었는데. 나에겐 그 뿐이었는데. 우리는 서로 뿐이었는데. 전부였는데. 그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그는 죽었다. 하고 싶은 말은 하지 못하고. 빗방울이 떨어졌다. 얼굴이 젖었다. 시야가 어두웠다. 그가 없다. 보이지 않았다.
<아치베른>
(1)
"어디 좀 보지." 베른하드는 아치볼드의 손을 쳐내려 했지만 느긋한 얼굴만 보아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드센 악력이 그를 붙들고 있었다. 아치볼드는 두 손으로 조심스레 베른하드의 손을 감싸고 피가 엉겨붙은 장갑을 벗겨내었다. 상처로 엉망이 된 손이 드러났다. 베른하드는 잇소리를 내며 손을 빼내려고 하였지만, 힘을 줄수록 통증이 밀려와 결국 아치볼드가 하는 양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치볼드는 선혈이 흐르는 손을 입술에 대었다가, 뺨으로 가져가 살짝 부볐다. 아픔과 불쾌감이 뒤섞여 베른하드의 얼굴은 충분히 일그러졌다. 상처 뿐이 아니어도 오랜 시간 검을 쥐어 굳은살로 거칠어진 손이었다. 그 감촉에 집중하며, 아치볼드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워서 말이야." 베른하드는 괴로운 듯, 숨을 고를 뿐 말이 없었다.
(2)
"괜찮으니까 창문 닫고 이리 와라."
"음?"
"감기 든다."
베른하드는 짤막하게 말했다. 의연한 척 서 있기는 했으나 쌀쌀한 바람에 팔을 문지르던 아치볼드는 머쓱한 얼굴로 창문을 닫았다. 베른하드가 오는 기척을 느끼자마자 담배를 비벼 끄고 창문을 여는 것으로도 모자라 몸에 남은 냄새까지 우려하여 창가에 기대있던 그였다. 베른하드는 한숨 쉬듯 말했다.
"그렇게까지 나를 배려해 줄 필요는 없다. 게다가 내 방도 아니고 네 방이야. 매번 미안하게 만드는군."
아치볼드는 그저 선선히 웃기만 했다.
(3)
"자네가 없으니 아무래도 어렵더군. 뭐 어쩔 수야 없지만..."
"아치볼드."
베른하드가 침묵하는 바람에 혼자 떠드는 꼴이었던 아치볼드는 갑작스러운 부름에 갸웃하며 고개를 돌렸다. 베른하드는 한 손으로 탁자를 짚고 얼굴을 떨군 채였다. 별 다를 것 없이, 이름을 불렀을 뿐이었지만, 평소와는 어딘가 다른 투였음을 아치볼드도 뒤늦게 깨달았다. 탁하고, 미약하게 떨리는 목소리가 뒤따라 흘러나왔다.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 아치볼드는 희미하게 웃었다. 망자의 세계에서 만난 동행에서, 먼 옛날 많은 시간을 함께 했던 전우로 돌아갈 때였다. "기억이 났나보군. 그럼 다시 인사할까. 오랜만이네, 베른하드." 그는 베른하드가 힘주어 주먹을 쥐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마침내 재회였다. 누구보다 만나고 싶었고-누구보다 만나고 싶지 않았던 이와의.
...
"날 지켜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지? 즐거웠나? 화가 났나? 내 기억에 네가 조금도 남아있지 않음에"
"죄책감 뿐이었다."
"......"
"차라리 기억을 되찾지 않길 바라기도 했다. 비겁한 생각이었지만. 자네를 기억해낸 순간부터 줄곧 그랬어. 그래, 나도 기억을 찾은지 얼마 되지 않았다. 자네보다 조금 빨랐을 뿐이야. 그저 괴롭더군. 죄스럽더군. 나를 원망할까 두렵더군. 그래...베른하드. 어떤가. 자네는 그때 무슨 기분이었는지, 이제라도 말해주겠나? 듣겠네. "
베른하드는 입술을 사리물었다.
(4)
적어도, 그는 무사하겠구나. 인류의 희망, 레지먼트의 재건, 글쎄, 이 상황에서 그런 것이 다 무슨 소용일까. 죽는 순간에 위선적인 박애를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그가, 산다는 것. 좀더 살아갈 거라는 것. 다행이다. 끝내 이기적이게도, 다행이다.
"오, 괜찮은 솜씬데? 한동안 박쥐나부랭이나 잡다가 제대로 된 상대를 만나니 기분이 좋군." 베른하드는 검을 거두었다. 자세를 바로잡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의 평정은 짧은 순간에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그였다, 어떻게 잊을 수가 있을까.
"자넨 참 괜찮은 사람이야. 죽어서야 만났다는게 좀 애석하군. 살아서 보았다면 또 좋은 친구가 되었을 텐데."
아치볼드는 장난스럽게 베른하드의 팔을 붙들며 피식 웃었다. 베른하드는 시선을 내리깔 뿐 따라 웃지 않았다. "이런, 무거운 이야기였나."
"베른하드, 왜 그러는 건지 내게 말해주지 않겠나?" 아이를 어르는 양 다정한 목소리였다. "물론 삶이 유쾌했으리라는 보장도 없고 죽음은 더더욱 그럴 테지만 그래도, 마주해야 하지 않겠나. 알아둘 필요는 있지 않겠나. 자네가 이미 그랬듯이."
"어떤 삶을 살았든 과거에 지나지 않아. 나는 지금 여기에 있고, 자네와 함께지. 믿어줬으면 좋겠군." 그의 말에 결코 거짓이 없음을 베른하드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아치볼드가 알지 못하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변하지 않는, 고정된 과거였다.
"베른하드..." 몰아쉰 숨소리가 거칠고 흔들렸으므로 말에 깃든 어조를 당장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나 이어진 말은 그보다 진정되고, 분명했다. 의심할 여지조차 없이. "자네는 그때...결국." 베른하드는 눈을 감았다. 끝이, 났다.
바뀐 것은 오히려 베른하드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되돌아간 것일 터였다. 옷을 갖춰 입은 그는 냉정하고 사무적인 어조로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설명했다. 배신과 전멸에 대해서도. 아치볼드는 좀처럼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익숙했지만, 낯설었다.
"그런데 베른하드."
"널 유린하다시피 한건 내가 뭐라 말하든 치졸한 변명밖에 안 될 것이다. 네가 원하는 대로 최대한 사죄하겠다."
"잠깐만, 베른하드. 진정하고 내 말을"
"잘 생각해보고 내게 알려주면 그대로 따르지. 오늘은 늦었으니 이만."
그저 무뚝뚝한 얼굴로 술잔을 부딪치던 그를 기억했다. 하지만, 애끓는 목소리로 손을 부여잡았던 그 역시 기억했다. 어느 쪽이 맞을까, 그것을 과연 나눌 수 있을까, 그는 대체 언제부터, 그는 왜 아무 말도, 나는 왜 이제야.
"무슨 짓이야!"
"내가 묻고 싶은데. 자네가 하는 짓 난들 못하겠나?"
"위험해, 어서 도망쳐!"
"거절하지. 이번에는 같이 죽는 편이 낫겠거든."
"......"
"옛날 생각 나는군. 이렇게 말하니 꼼짝없이 나이든 모양새지만. 우보슨가 뭔가, 그 커다란 괴물 잡을 때 말일세. 자네가 나를 구하러 와줬잖나."
"...결국 네가 날 구했지."
"결과는 미뤄두더라도. 그러니 내가 은혜도 모르는 놈이라는 걸세. 결국 나는 자네랑 끝까지 함께하지 못했으니. 실수는 한번이면 될 테지. 이번엔, 함께 하겠네."
베른하드는 곧 피가 나도록 입술을 사리물었다. 다행이다,라는 마음에 거짓이 있었던가. 결국 그가 함께 헛되이 죽어주길 바랐던가. 아니었다. 그렇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가 해주는 말이, 생전의 그 어떤 기억보다도, 간절하고, 행복했다.
<아치리리>
"자네는 참 재밌어. 하기야 처음부터 그랬지. 베른하드랑 쌍둥이 형제라는 말을 듣고 어찌나 놀랐던지. 그도 그럴 것이 자네들 정말로 닮은 구석이라곤 없는걸. 기껏해야 눈 정도일까. 그 베른하드랑 같이 있으니, 더욱이 쌍둥이 동생이라니, 자네가 영 철부지로 보이는 것도 어쩔 수 없지 않나. 자네는 사람이 너무 좋아. 정이 많지. 베른하드가 우려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야. 그러니까-이제라도 좀 냉정해 지는게 어떤가."
프리드리히는 여전히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후-하고, 아치볼드는 담배연기를 길게 내뱉었다. 아직 긴 담배를 비벼끄고 그는 프리드리히에게 다가갔다. 담배냄새가 밴 손이 프리드리히의 턱을 붙잡았다. 연녹색의 눈동자는 여전히 젖어있었고, 희미하게나마 분노의 기색을 띠었다. 오, 이러니 좀 닮은 듯도 하군. 아치볼드는 피식 웃었다.
"어리광 부리지 말게 프리드리히, 자네 형이 미처 하지 못한 훈육을 나라도 대신해 주는거야. 두 눈 똑바로 뜨고 잘 보게. 동료들이고 혈육이고 죽어널부러지면 남는 것이 결국 무엇인지."
<리즈베른>
(1)
베른하드는 커피 한 모금으로 입을 축이며 책장을 넘겼다. 밤이 깊은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바깥은 왁자지껄한 소란이 계속되었다. 베른하드의 방만이 이질적인 정도의 고요에 잠겨 있었다. 오늘은 중대한 임무를 무사히 성공한 대원들을 축하하기 위한 연회가 열렸다. 규율이 엄격한 레지먼트였으나 대원들의 사기를 고조시킬 수 있는 이런 기회에 있어서는 상층부도 나름 관대하였다. 덕분에 대원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술잔을 부딪히며 즐거운 한 때를 보냈다. 다만 베른하드는 컨디션 난조를 들어 일찍이 방에 돌아온 참이었다. 본래 여러 사람과 소란하게 부대끼는 것을 즐기지 않는 그는 자신의 방에 돌아와서야 비로소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향이 좋은 커피와 책 한 권이 그의 온전한 휴식이었다. 그가 편안한 기분으로 책에 몰두하고 있을 때였다. 돌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베른하드는 조금 경계하는 기색으로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다시 끌려나가는 건 달갑지 않았다. 아니면 프리드리히인가, 또 반나체로 돌아다니고 있는 건 아니겠지. 베른하드가 한숨을 내쉬었을 때 문 밖에서 뜻밖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베른하드, 방에 있나."
"...리즈?"
목소리의 주인은 분명 리즈였다. 의외의 방문에 좀 당황하며 베른하드는 문을 열었다.
"역시 있었나. 안 보이기에 여기 있을 줄 알았다."
"...데리러 온 겁니까."
"아니."
리즈는 짤막하게 말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베른하드는 주춤거리며 몸을 비켜주었다. 술냄내는 나지 않았다. 리즈가 술을 즐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베른하드도 알았다. 그런데 갑자기 왜, 베른하드가 묻기도 전에 리즈는 침대에 푹하고 쓰러졌다. 베개 사이에서 피곤해, 하고 신음같은 말이 들려왔다.
"...뭡니까? 갑자기."
"쉬고 싶어서."
"제 방입니다만."
"알아."
베른하드는 입을 다물었다. 그것이 곧 물음임을 알고 리즈가 건성으로 덧붙였다.
"여기가 제일 조용할 것 같더군. 내 방에 가봤자 다들 성화일 테고."
리즈는 오늘 임무를 성공으로 이끈 장본인이었다. 사람들이 가만 놔둘 턱이 없었다. 그는 연회의 주인공인 셈이었다.
"함께 축하하는 자리이지 않습니까."
"축하라? 무엇을."
"그야 승리겠지요. 생존에 대한 축하일테고요."
"죽음에 대한 애도는 안하나?"
베른하드는 말하기를 멈추었다. 리즈는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다소 신경질적인 시선으로 베른하드를 바라보았다.
"승리하기까지의 희생은 기억하지 않느냔 말이다."
"당연히 기억하겠지요."
"오늘 죽어나간 동료들을 기억하기 위해 저렇게 웃고 떠드는 중이라고 말할 셈인가? 잘도 그러겠군. 손에서 피냄새도 가시지 않았는데 비위들도 좋아."
굳이 반박을 하자면 승리와 거기에 따르는 필연적인 희생에 대해서 얼마든 늘어놓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베른하드는 그러는 대신에 침묵했다. 무의미한 일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리즈는 나이는 어리지만 최초의 에이스라 불리는 남자였고, 베른하드와 견주어도 결코 적지 않을 만큼 숱한 전장을 누벼왔을 터였다. 그런 그가 승리와 희생의 당연한 인과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저런 불필요한 소리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베른하드는 문득, 리즈의 모습과 말투가 어딘가 낯이 익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매우 익숙한 감각이었다. 베른하드가 이채로운 눈빛을 띠었을 때 리즈는 침대에 몸을 맡기고 눈을 감고 있었다. 잠깐동안 방안에 정적이 흘렀다. 얼마나 지났을까, 리즈는 제 등을 쓰다듬는 손길에 흠칫하며 눈을 치켜 떴다. 어느새 다가온 베른하드가 느릿한 손길로 등을 매만지고 토닥였다. 리즈는 입술을 비틀며 물었다.
"...뭐냐?"
"프리드리히는 이렇게 해주면 곧잘 잠이 들더군요."
베른하드는 '칭얼거릴 때'라는 수식은 빼고 말했다. 리즈는 어처구니 없는 표정이었다.
"선배를 동생취급이라? 네 행동치고는 영 무례하군."
"딱히 그런 것은 아닙니다.그냥 제대로 쉬지 못하는 것 같아서."
리즈는 대꾸하지 않았다. 베른하드의 말은 사실이었다. 집요하게 들려오는 이명은 저 멀리 연회에서 들려오는 소란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둔한 소리는 괴물과 사람의 우짖음이었다. 계속 피냄새를 들이키던 코끝에 베른하드의 채취가 닿았다. 커피와 고서의 냄새가 알싸했다. 그동안에도 베른하드의 조심스러운 손길은 계속됐다. 차츰 눈이 감겨왔다. 이윽고 리즈의 숨소리가 느려지고야 베른하드는 손을 뗐다. 전장에서 살육하는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른, 선배의 잠든 모습을 그는 잠깐동안 지켜보았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걷어주며 베른하드는 작게 속삭였다.
"수고했습니다. 쉬십시오, 리즈."
(2)
(리즈베른 현대물 캠퍼스 이야기)
http://www.twitlonger.com/show/n_1rjkc1h
"그치만 선배, 베른 인기 되게 많단 말이야. 지난번에도 동기 중에..."
"쓸데없는 소리 말아, 프리드리히. 신경쓰지 마십시오 선배."
"아니 다 좋으니 존댓말이든 반말이든 통일해주지 않겠어 너희? 듣는 입장에서 아주 정신 사납다. 위화감이 아주"
"아, 지난번에 준 커피는 잘 마셨어."
"입에 맞았다면 다행인걸. 내가 잘 모르니 매장직원한테 추천 받았거든."
"향도 맛도 좋았다. 고마워." "어, 그거 리즈 선배가 선물했던 거야?"
"너도 마셨냐?
"아니, 난 커피 안 좋아하고 무엇보다 베른이 혼자 다..."
"그랬냐."
"어차피 안 좋아하는 것 아니까. 권하지 않은 거다."
"다음엔 술 챙겨줄테니 서운해 마라, 프리드리히."
베른하드와 리즈는 몇 마디 더 나누면서 자기들끼리 걸어가 버렸다. 프리드리히는 멈춰 서서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웃음기 가신 얼굴로 중얼거렸다. 거짓말. 내가 손댈까봐 방에 두고 혼자 마셔놓고. 멀찍이서 베른하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오지 않고 뭐해, 프리드리히."
프리드리히는 우두커니 서서 그 모습을 응시했다. 익숙한 모습이었다. 뒤쳐질 때면 항상 멈춰서 기다려주고 불러주었던 형제의 모습. 그런데 지금은 그 곁에 다른 이가 있다. 그래서인지 멀어보이고, 묘하게 낯설다. 더 일찍 각오했어야 했던 걸까. 프리드리히는 주먹쥔 손에 힘을 주었다.
<아치리즈>
(1)
"응, 예전같지 않아 선배. 선배가 죽고도 나는 꽤 살았거든. 이런 소리 매정한가?"
(2)
요즘은 싸움이 잦네. 게다가 또 리즈선배. 나이가 나이인데다 실력도 보통이 아니니 치기는 인정하지만. 그래도 저래서는 제 명줄대로 못 죽지. 마수보다 부대 내 대원한테 당하겠다고. 그래서야 무슨 개죽음이야? 솔직한 말로 어리석어 보일 뿐이군.
"아아, 선배님들 말씀 나누시는데 끼어들어 죄송합니다. 그보다 지난번에 찾으셨던 그 술 말인데요...예 어렵기야 했지만 어떻게 한 병 손에 들어와서..."
"리즈선배, 선배도 요령을 좀 길러보지요? 그러다 등에 칼 맞습니다. 아무리 에이스라해도..."
"건방진 자식이. 사사건건 끼어들어 훈계군. 네 위치를 똑바로 자각한다면 나보다는 네 걱정을 해야 할거야. 나는 나이만으로 대접해주지 않아. 처신 똑바로 하는 편이 이로울 거다."
"새겨듣지요 선배님. 충고 없이도 목숨 잘 부지하시길."
(2)
"늙어빠진 얼굴 보고 예상했다."
"너무하네, 선배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아까운 나이에 요절한 몸이야. "
" 아치볼드. 네 목적은 뭐지? 너도 현세의 부활을 꿈꾸나?"
"부활, 글쎄. 별로 내키지 않아."
" 왜지?"
"가봐야 아무 것도 없을 테지. 와보니 만나고 싶었던 그리운 얼굴들 모두 여기에 있더군..."
"....."
"선배, 나는 살아서 선배를 보내고, 베른하드와 프리드리히를 보내고, 또 다 큰 제자를 보내고, 친구의 아이도 보냈어. 살아서 모두 죽는 것을 바라봤어. 이제야 따라왔어. 반복하고 싶지 않아. 힐난해도 좋아. 하지만 선배가 죽고 난 후 내가 해온 일들, 봐온 것들, 그저 한 번쯤 지나가듯이라도 생각해줬으면 좋겠어. 맞아, 동정해달라는 말이야. 물러서 지켜본 나를 변명하는 말이야. 나는 당신들과 함께 죽지 못했으니."
" ...대신 살아주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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