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의 엑소시스트 커플링 합작에 참여했던 글입니다. 커플링 미약, 리버시블 느낌 있을 수 있습니다.

 

  신의 손길이 지상까지 닿으려면 빛의 형태를 빌려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토록 경이롭게 빛나는 오후의 햇살이었. 예배당을 장악한 어둠은 작은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배어든 햇빛과 섞여 서서히 옅어졌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하시자 빛이 생겼다’-라던가. 평범한 오후로부터 거룩한 천지창조와 신의 권능을 떠올리며 새삼스러운 감회에 젖을 만큼, 그래, 근래에는 부쩍 감정적이기는 했다-고 예배당 의자에 앉은 사내는 순순히 자신의 단상(斷想)을 인정했다.

  그렇다, 천지창조. 혼란에서 질서를 세우시고 빚은 흙에 숨결을 불어넣어 사랑하는 아들을 손수 만드셨으니 이 모든 것이 보시니 참 좋았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 형제를 사랑하여라. 등받이에 한결 편히 몸을 기댄 그는 논리를 포기하고 두서없이 지껄였다. 사랑, , . 단어에 형체가 있었다면 아마 이빨 끝에 짓씹혀 처참한 꼴이 되었을 터였다. 그토록 사내는 자신의 말끝을 집요하리만큼 붙잡고 힘주어 중얼거렸다. 종내에는 혀끝에 쓴 맛이 번지는 것처럼 얼굴을 찌푸렸다가 이내 맥없이 웃었다.

  여전히 주위는 어둠이 우세했으나 빛은 줄어드는 일 없이 조금씩 몸을 불리고 있었다. 사내는 팔을 뻗어 창문 아래 햇빛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자잘한 먼지가 한겨울의 눈발처럼 하얗게 부유했다. 고작 두 뼘밖에 되지 않는 창문으로 빛은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왔다. 응당 그래야 한다는 것처럼, 고집스럽고, 올곧은 기세로 가차 없이 어둠을 흩어놓았다. 주저라고는 알지 못하는 그 모습이 아름다웠고, 동시에 언제든지 깨질 것 같이 불안했다.

  그는 누군가를 떠올리고 있었다.

  끼익, 깊은 정적을 찢은 것은 오래된 경첩이 낸 소음이었다. 사내는 출입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급히 쏟아지던 빛은 다시금 좁혀든 문 뒤쪽으로 물러났다. 문가에 선 남자 위로도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하지만 한 줌 남은 햇볕도 그가 빛나는 데에는 충분했다. 유난히 하얗고 빛나는 남자였다. 빛을 흠뻑 머금은 긴 금발을 흔들며 남자는 예배당 안으로 들어섰다.

 

후지모토 시로.”

 

  사내-후지모토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피식 웃었다. 우아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에는 마땅히 갖춰야 할 겸손과 예우보다 오만한 기색이 뚜렷했다. 그 부분만 해도 지적하자면 얼마든 할 수 있었지만, 그는 미소를 띤 채 잠자코 남자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몇 가지 묻겠습니다.”

과연 모범생은 달라. 베이지 때부터 꽁무니만 쫓아다니며 시시콜콜 물어대더니만. 그 버릇은 십수 년이 지나든 계급이 바뀌든 변하지를 않는군. 그래, 어디 한 번 말해봐라, 아서.”

 

  남자, 아서 오귀스트 엔젤은 이죽거리는 후지모토의 말을 무시하고 그의 뒷자리에 와 앉았다. 교회의 의자는 서로 마주보는 일 없이 앞을 향해 늘어서 있었고, 결과적으로 후지모토는 고개를 제자리로 돌린 다음부터는 아서의 모습을 보는 대신 기척만을 느낄 수 있었다. 젠장, 뒤통수가 가렵군. 그는 가볍게 투덜대며 교회당 맨 앞에 걸린 십자가를 바라보았다. 곧이어 들려온 아서의 목소리는 흡사 신의 음성처럼 엄숙했다.

 

그럼 묻겠습니다. 악마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풋내기는커녕 이미 어느 정도의 경지에 다다른 이들이 나눌 말로는 우습기 짝이 없는 질문이었으나 후지모토는 웃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서만은 그 질문에 대해서 평생 의문 따위를 가져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후지모토는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십수 년 전, 아서가 아직 어린 견습기사였을 때에, 학습의 결과보다는 본능에 가깝게 외쳤던 대답을. 기억은 곧 시간의 경계를 허물어 현재가 되었다. 치기가 앞섰던 과거와 달리 한결 나직하고 차분한, 그러나 더욱 강경해진 목소리로 아서가 답했다.

 

처단해야 합니다.”

 

  후지모토는 긍정도 부정도 없이 고개를 들어 천장을 노려보았다. 누군가는 구름 위로 올라가고, 누군가는 시퍼런 불길 속으로 떨어지는 그림이 섬뜩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환희에 휩싸여 위를 바라보는 인간은 무엇을 고대하고 있는 것일까, 거기에 그 위대하신 사랑이라는 것이 있는지.

  그러나 만약 불길 속에서 태어난 사랑이라면?

  아까보다 높아진 아서의 목소리가 후지모토의 마음을 비집었다.

 

심지어 사탄과 관련이 있다면?”

 

  후지모토는 가까스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내리깐 눈꺼풀이 살짝 떨렸다. 아무래도 감정적인 것이 맞아, 그는 제 자신에게 조소하며 입에 고인 쓴 침을 삼켰다. 상부의 권위자들이 윽박지르는 앞에서도 눈 한번 깜빡이지 않은 그였다. 권력과 힘은 그에게 위협이 아니었고 두려움을 주지도 못했다. 설령 그들이 일체 칼을 휘둘러 숨이 끊긴다 한들 파계신부가 마지막만은 순교로 마무리했다며 태연하게 그들의 복장을 뒤집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한 그가 정작 두려워하는 건, 예컨대 이런 것들이었다.

  불길 속에서 태어난 사랑, 오직 앞으로 내리쬐는 빛줄기.

 

물을 것도 없이 즉결.”

 

  아서의 목소리는 눈앞에 책을 놓고 낭독하듯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는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올려 후지모토의 어깨에 살짝 얹었다. 그 모습만 두고 보자면 격려나 위로에 가까울 것이었다. 하지만 후지모토는 제 어깨에 닿은 손이 온기라고는 없이 놀랄 만큼 차갑다는 사실을, 또 다정이나 애정과는 거리가 멀 감정으로 아주 미세하게나마 떨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목소리와 모습만으로는 결코 모를 사실이 고작 어깨와 맞닿은 한 손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후지모토는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그 변화를 알지 못하는 아서는 이번에도 후지모토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질문을 던졌다.

 

더욱이 그럴 만한 능력이 되었다면요?”

 

  가지런히 모아놓은 손가락이 조금씩 꿈틀거렸다. 벌레가 기어가는 양 느리게 움직이던 손은 어느새 후지모토의 목덜미에 이르러 있었다. 금방이라도 단단히 옥죌 듯, 손에 힘을 주며 아서가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변명의 여지조차 없지.”

 

  후지모토의 품에는 장전된 총이 있었고, 또 물리적인 무기가 아니더라도 언제든 꺼내놓을 수 있는 여러 공격수단들이 있었다. 물론 악마를 퇴치하기 위한 것이므로 인간에게는 효과가 썩 좋지 않겠지만, 한 명쯤 쓰러뜨리는 데에는 역시 무리가 없을 터였다. 그럼에도 그는 무방비하게 팔을 늘어뜨리고 아서의 손이 제 목을 감싸도록 내버려두었다. 자신에 대한 믿음보다는 아서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물론 아서는 절대 인정하지 않을 것이었다.

  어느덧 마지막 선고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만약 그 모두를 어겼다면, 그것을 무어라 부르겠습니까?”

 

  후지모토는 눈을 감고 아서의 말을 들었다.

  긍지 높은 남자가 있었다. 그가 제 긍지를 지키기 위해 애써 오만한 시선으로 바라봐야 하는 사내가 있었다. 사내는 그 가여운 노력을 알고 있었으나,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남자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멈추지를 못했다.

  아무런 흔들림 없이 단단했던 말이 마지막에 이르러 영문을 알 수 없이 무너졌다. 산산이 부서져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 희미한 소리가 겨우 형체를 유지한 채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배신자.”

 

  순간 핏줄이 돋을 정도로 힘이 들어갔던 손이 금세 아래로 툭 떨어졌다. 후지모토는 두어 번 마른기침을 내뱉고 욱신거리는 목을 쓰다듬었다. 죽어라고 검 휘두른 보람은 있나보지, 그는 입 밖으로 내어 불평할까 하다가 등 뒤에서 들려온 숨소리를 듣고 이내 그만두었다. 숨은 곧 뚜렷한 말소리가 되었다.

 

최악의 팔라딘.”

 

  상대를 바로 앞에 두고 한 비난이었으나, 실제로는 그 지척에 가 닿을 힘조차 잃어버린 허탈한 독백이었다. 후지모토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아서를 향해 섰다. 그는 고개를 떨어뜨린 채 연신 마른세수에 여념이 없는 아서의 어깨를 짚으려 했다. 그러나 아서는 신경질적으로 후지모토의 손을 쳐냈다. 그는 얼굴을 들어 날이 선 눈으로 후지모토를 노려보았다.

 

왜지?”

 

  후지모토가 무어라 입을 열려 했을 때였다.

  유독 멀게 느껴지는 곳에서 돌연 아기 울음소리가 어떠한 계시처럼 터져나왔다. 태초부터 전해온 듯, 온 인류의 희망과 생명의 표징처럼 힘차고 절박한 소리였다. 예배당 한쪽 벽에 그려진 작은 그림 속, 갓 태어난 구세주의 울음이 꼭 그리 들릴 것이었다. 별 생각 없이 담배를 꺼내 물던 후지모토는 혀를 차며 손끝에 힘을 주었다. 분지른 담배가 빙글 돌며 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사제복에 묻은 담뱃가루를 툭툭 털어내며 말했다.

 

더 물어볼 게 없다면 이만 실례해도 될까? 우유 먹일 시간이라서.”

 

  아서는 소리가 들려온 곳을 주시하며 허리춤에 찬 검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후지모토는 그 모습을 보고도 전혀 경계하거나 분노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한 치의 의심도 없는 그의 단호한 표정을 보며 아서는 깊게 한숨을 내쉰 다음 손을 거두었다. 갓난아기에 대한 어리석은 자비도, 동료이자 스승인 사람에 대한 정도 아니었다. ‘상부의 결정 때문이었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믿어 마지않았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한층 잦아들어 칭얼거리는 소리로 바뀌었을 무렵, 그 역시 몸을 일으켰다. 후지모토와 마주선 그는 지극히 사무적인 투로 쏘아붙였다.

 

예외는 없어.”

오냐, 명심하지. 아무튼 한결같은 녀석, 너도 좀 휘어지면 좋을 텐데. 곧은 것도 좋지만, 그러다가 부러지는 수가 있어. 조심해라.”

 

  아서는 대꾸 없이 미간만 찌푸렸다. 그는 옷자락을 크게 휘날리며 돌아섰다. 서둘러 자리를 뜰 것 같았던 그가 뜻밖에도 꽤 오랜 시간 멈춰 서서 움직일 생각을 않자, 뒤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던 후지모토도 의아쩍은 표정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아까와는 달리 이제는 후지모토가 아서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길게 늘어뜨린 금발이 저무는 낮의 강물처럼 금빛으로 찬란하게 반짝였다. 그가 그 반짝임에 시선을 빼앗겼을 때, 아서는 나지막이 그를 불렀다.

 

후지모토.”

 

  후지모토는 습관처럼 대답하지 않았다. 아서 또한 익숙하게 말을 이었다.

 

기분이 어떻지?”

 

  잠깐 얼떨떨한 얼굴로 아서를 바라보던 후지모토는, 곧 큼지막하게 웃으며 말했다.

 

해봐라, 아주 째진다.”

 

  아서가 원했던 답은 결코 아닐 것이었으나, 그는 아까같이 검을 쥔다던가 하지는 않았다. 후지모토는 그것이 상부의 규율이나 장소 때문이 아님을 알았다. 충분히 그럴 만한 남자지만, 더 이상 우려할 만한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을 확신했다. 그의 예상대로 아서는 줄곧 붙잡아두었던 걸음을 천천히 떼 앞으로 나아갔다. 입구에 이르기까지 아서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윽고 그는 홀연히 나타났던 것과 같이 홀연히 교회 밖으로 사라졌다. 끝끝내 당당하고 곧은 걸음이었다. 후지모토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아서가 남긴 밝은 잔상을 바라보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사실만이 남았다. 자신은 아서를 결코 굴절시킬 수 없을 것이라는 깨달음, 그것은 크나큰 안도였고, 아쉬움이었다.

  이별인사치고는 영 싱거웠던가.

  후지모토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서 간만에 영창이 아닌 순수한 기도를 올렸다. 악마를 퇴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푸른 불꽃을 꺼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 숨쉬는 두 아기를 위해서였다. 그리고 타협이라곤 모르는 한 남자의 앞길을 위한 진심 어린 간원이기도 했다. 스테인드글라스의 빛은 여전히 날카롭게, 그러나 더없는 온기를 가지고 어둠을 녹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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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커미션 공지  (0) 2016.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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