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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닝워켄] 그 남자의 취미

로이비 2013. 5. 15. 23:17

※윤슬(@zlshdugod) 연성빵 리퀘스트, 저작권은 윤슬에게 있습니다.
개그성향, 캐릭터 자기 해석, 용두사미 급마무리 주의 바랍니다.



  [unlight/우닝워켄] 그 남자의 취미


  어느덧 밤보다는 새벽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 한참 술을 부으며 기세를 올리던 사람들도 하나 둘씩 자리를 비웠다. 브라우닝은 가까운 테이블에 홀로 앉아 몇 병째 술을 비우고 있는 한 사내를 흘끔거렸다. 별로 의미를 둔 행동은 아니었다. 그저 직업병이나 버릇 정도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탐정인 그는 본래 사물이든 사람이든 주의 깊게 보고 추리하기를 즐겼다. 그리고 그것이 타인의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좋은 행동임도 알고 있었다. 평소라면 요령 좋게 숨겼을 시선이 오늘은 적나라했다. 그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할 만큼 브라우닝은 술에 취해 있었다. 그는 반쯤 감긴 눈으로 사내를 쳐다보았으나, 다행히 사내 역시 충분히 취한 탓에 저를 향하는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사내는 그리 추레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딱히 공들였다 보기도 힘든 옷차림이었다. 하기야, 이런 곳에서 이 시간까지 혼자 술 마시는 처지란 다 거기서 거기 아니겠어. 브라우닝은 새로 따른 술을 입에 털어 넣으며 생각했다. 지금 제 꼴이 딱 저렇겠거니 싶어서 자꾸 비식거렸다. 누구는 제 정부(情夫)한테 얻어터지기까지 했는데, 별 되도 않는 꼬투리를 잡아서는 계약위반이니 뭐니 술값만 던져줬겠다, 벼락 맞을 아줌마 같으니, 밤길이나 조심하라지. 그는 속으로 낮에 만났던 의뢰인에게 악담을 퍼붓다가 탁자에 늘어선 술병을 대강 헤아려보았다. 슬슬 술값이 하루벌이를 넘어설 모양이었다. 브라우닝은 우울한 얼굴로 턱을 매만졌다. 호되게 얻어맞은 자리가 새삼 쓰라렸다.

  옆 테이블의 사내가 몸을 일으키더니 걸음을 휘청거렸다. 붙들어줘야 하나, 브라우닝이 정작 몸은 움직이지 않고 우두커니 앉아 생각만 했을 때였다. 한동안 잠잠하던 출입문 종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적막을 깼다. 술집에 들어선 여자는 잠깐 두리번대다가, 브라우닝이 내내 훔쳐보던 사내에게로 곧장 걸어갔다. 잠깐 동안 웃음소리가 소란했다. 혀 꼬인 소리를 대강 들어 넘기면서 여자는 사내를 부축했다. 아무렇게나 풀린 다리도 옆에 단단히 붙들 것이 생기자 얼추 제 구실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조금씩 비틀거리면서 두 사람은 문 밖으로 사라졌다.

  그들이 퇴장한 뒤, 술집을 에워싼 적막은 한층 견고해졌다. 브라우닝은 조잡한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툴툴거렸다. 비슷한 게 아니라 나은 처지였군. 그는 제 몸을 의지하자고 당장 불러낼 만한 사람이 있나 잠깐 고심해 보았으나 영 떠오르는 바가 없었다. 가족, 친구, 동료, 온갖 카테고리를 다 뒤져보면 하나쯤 나올 법도 하건만 도대체가. 그는 마지막으로 술병 바닥에 고인 술 몇 방울까지 탈탈 털어냈다. 동행이 있든 없든 이만 일어날 때였다. 모자와 목도리를 두어 번 떨어뜨릴 뻔 하면서, 브라우닝은 어렵사리 술집을 나섰다.

 

  밖으로 나오자 급기야 비까지 쏟아졌다. 모자에 코트까지 덮어쓰면 아쉬운 대로 머리는 가릴 수 있을 터였지만, 브라우닝은 그냥 주머니에 양 손을 찔러 넣고 터벅거리며 세찬 빗속을 지났다. 그나마 남아 있던 온기도 비 내리는 새벽의 찬 공기 속에서는 버티지를 못했다. 절로 몸이 떨려왔다. 미처 아물지 않은 상처에 차가운 빗물이 진득하게 스며들었다. 아야야듣는 사람도 없이 앓는 소리를 내다보니, 외로움이며 서러움이며 하는 것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그는 발에 걸린 깡통을 걷어차며 빽하고 소리를 질렀다.

다 제 짝 끼고 다닌다 이거지. 거 마누란지 애인인지는 모르겠지만 별로 예쁘지도 않더만, 나한테는 훨씬 근사한 사람이 있어, 예쁘고 상냥하고 이렇게 얻어터지고 나면 기꺼이 상처도 치료해주는 이쁜이란 말이야.”

  분개한 브라우닝은 자주 가는 병원 간호사 리타-지난주에 딱 여섯 번째로 데이트 신청을 거절당한-을 떠올리며 아무렇게나 지껄이다가 돌연 입을 다물었다. 순간적으로 그의 머릿속에 영 뜬금없는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상상일 뿐이었지만, 그는 화들짝 놀라며 무심코 주위를 둘러보았다. 거리는 익숙한 모습으로 비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여긴…….

  뚜렷이 방향을 정해두지 않고 발걸음이 닿는 대로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사무실에서는 꽤나 멀어진 참이었다. 하지만 모르는 길은 아니었다. 그리 자주 오지는 않지만, 가끔씩은 꼭 지나는 곳이었다. 브라우닝은 아직 붓기가 남은 뺨을 쓰다듬었다. 못 참을 정도는 아니어도 적잖이 거슬리는 통증이었다. 이 시간에 병원을 열었을 리도 없고, 이를 어쩐다. 그는 구태여 떠올린 이 고민이 어떤 답을 이끌어내려 하는지 깨달았다. 마침 근처였다. 길게 내쉰 한숨에서 진한 술냄새가 풍겼다.

상처 치료해줄 이쁜이를 만나러 가볼까.

()로 다칠 각오를 해야겠지만, 그렇게 덧붙이며 브라우닝은 사람 없는 거리를 가로질렀다.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려보았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다른 이의 집이었다면 새벽녘 깊이 잠들었을 집주인을 깨워야 하는 실례에 몸이 움츠러들었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 브라우닝이 걱정하는 것은 갑작스레 단검이나 침()이 날아드는 상황뿐이었다. 그는 조금 뒤로 물러서며 다시금 문을 두드렸다. 그래도 대답이 없자, 한 손으로 목을 감싸며 걱정스러운 투로 말을 꺼냈다.

워켄, 안에 있나? 나야, 브라우닝.”

  침묵 사이로 빗소리가 찾아들었다. 조금 전보다 더 거세진 듯한 소리를 들으며 브라우닝이 뒤늦은 걱정을 시작했을 즈음이었다.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문틈이 벌어졌다. 그 사이에서 노골적인 경계의 빛을 띤 워켄의 얼굴이 나타났다. 브라우닝은 능청스럽게 웃으려 했지만, 깊은 한기와 술기운 때문에 근육이 굳어 쉽지가 않았다. 어설프게 일그러진 얼굴이 그의 몰골을 더욱 두드러지게 했다. 감정표현이랄 게 그리 많지 않은 워켄이었지만, 그런 그조차도 새벽에 벌어진 난데없는 상황에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었다.

그 꼴을 하고 이 늦은 시간에대체 무슨 용무지?”

, 마침 근처에 왔다가, , 뭐야, 비가 내리는 바람에. 없었거든 그런 일기예보, 아침 신문이야 당연히 읽는데도. 매일 읽지 매일. 그러니까, .”

술 마셨나?”

, 그랬지. 좋아서 마신 건 아니고, 알잖아 어른의 사정이라는 게, 뭐 다 그런 법이니까. 사람이 자기 좋은 것만 하고 살 수야, 잠깐만 기다려 닫지 말고!”

  주저 없이 문을 닫고 들어가려는 워켄의 등 뒤로 애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워켄은 대꾸하는 대신 입을 앙다물고 브라우닝을 쏘아보았다. 가뜩이나 연구가 잘 풀리지 않아 날이 서 있던 참에, 왜 이 남자는 뜬금없이 찾아와서는 방해꾼에 불청객을 자처하는 거지. 워켄의 의문에 대해 브라우닝은, 결코 상대가 원하지 않았을 대답만 내놓았다.

하루만 재워주면 안 될까? 사무실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 하는 일은 절대로 방해하지 않을 테니까!”

부탁해, 두 손을 모아 쥐고 애원하는 브라우닝의 모습을 보며 워켄은 복잡한 심정이었다. 곳곳에 흙탕물이 튀어 거무죽죽한 바지며 본래의 색을 알아보기 힘든 목도리까지, 브라우닝의 꼴은 어디에 내놓아도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돌연히 객사해도 의심받지 않을 정도의 모양새였다. 시간은 새벽이었고 비는 한동안 멈추지 않을 모양이었다. 워켄은 결국 깊은 한숨을 한 번 내쉰 후, 문에서 비켜섰다.

 

  집안은 복잡하면서도 단정했고, 어둡고도 밝았으며, 전반적으로 뭐라 형언키 힘든 기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워켄은 브라우닝에게 있어 비교적 꾸준한 고객이었다. 의뢰를 받을 때는 대개 워켄이 직접 브라우닝의 사무실로 찾아왔지만, 그가 지나치게 바쁠 때에는 간혹 브라우닝이 워켄의 집에 들르기도 했다. 그러나 의뢰는 항상 간결했고, 채 몇 분도 되지 않아 이야기가 끝났기 때문에 브라우닝은 워켄의 집을 눈여겨 볼 틈이 별로 없었다. 주의를 기울여 들여다본 집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신비했다. 브라우닝이 온갖 물건에 일일이 시선이 팔려 있는 동안, 워켄은 무어라 중얼거리면서 마른 수건 한 장을 가져와 브라우닝에게 던져주었다.

  곧이어 그는 곳곳에 쌓인 책더미를 지나 방 한편을 차지한 옷장으로 향했다. 앉으라고 권하거나 달리 지시하는 말이 없어, 혼자 남겨진 브라우닝은 머쓱한 표정으로 가만히 서서 얼굴을 닦았다. 집안에 흔쾌히-사실 적절한 말은 아니었다-들인 것도 모자라 옷가지도 내어주다니, 보기보다 상냥하군. 술에 얼근하게 취한 탓인지, 그는 현관에 발을 들일 때까지만 해도 팽팽하게 유지했던 긴장을 풀고 금세 느긋해졌다. 여하튼 당장 단도나 침이 날아올 것 같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는 내쫓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선 호의라 해석하기로 하고, 한층 편안한 마음으로 워켄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잠옷은 아니지만 간소한 차림이었다. 얇은 셔츠와 바지는 미적기능이나 방한보다는 활동성을 우선으로 고려한 결과인 듯했다. 달라붙을 정도는 아니나 여유 없이 꼭 맞춰 입은 옷이 몸의 곡선을 여실히 드러내었다. 결 좋은 머리칼이 목덜미를 지나 어깨까지 흘렀다. 어둑한 공간에서 어렴풋이 떠오르는 상은 이상하리만치 관능적인 느낌을 주었다. 가늘지만 단단한 골격이 그가 사내임을 증명했으나, 얼핏 보아서는 여인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브라우닝은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리려다가 무언가에 붙들린 듯이 워켄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집안의 묘한 분위기나 아득한 빗소리, 혹은 술기운 탓일 수도 있었다. 원인으로 의심할 거리야 많았다. 무엇이 원인이었든 간에, 브라우닝은 워켄에게서 가히 유혹이랄 것을 느끼고 있었다. 제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당황스러운 일이어서, 그는 지금껏 살아온 날들을 하릴없이 되짚어 봤지만 딱히 성적 정체성에 의구심을 가질 만한 대목은 없었다. 사내한테 호감이라니, 아주 볼 장 다 봤군. 글쎄 어쨌거나 이쁜이는 맞잖아. 아냐, 어쩌면 그저 순수한 아름다움을 향한 탐미적인 욕구일지 몰라, 하고 브라우닝은 모호하게 생각했다. 물론 저 하나도 설득시킬 수 없는 가설이었다. 별 영양가도 없는 화제로 골치를 앓았더니 가뜩이나 취기가 오른 마당에 급격한 피로까지 몰려왔다. 혼몽한 가운데, 옷 사이를 오가는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뚜렷이 보였다. 브라우닝은 무의식적으로, 아직까지 옷장을 뒤적이고 있는 워켄의 등 뒤로 다가갔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워켄에게 가려 미처 보지 못했던 옷장 속이 훤히 시야에 들어왔다.

  그 안에는 화려한 프릴이 장식된 색색의 원피스와, 단아하고도 아름다운 온갖 블라우스와 스커트가 가득 걸려 있었다.

  브라우닝은 헤하고 벌어진 입을 굳이 다물지 않았다. 멍청하니 생각하길, 숙취해소제 몇 병 들이킨 것보다 술 깨는 효과가 좋다 싶었다. 흐렸던 정신이 단숨에 또렷해졌다. 저 옆에 걸려 있는 건 오버니삭스렷다, 그리고 머리띠, 머리끈, 리본, ……. 그가 눈을 굴리며 옷과 소품들의 종류를 구분하고 있는 동안, 워켄은 어느새 등 뒤까지 다가온 브라우닝이 마뜩지 않은 듯 주춤 물러섰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툭 내뱉듯이 말했다.

우선 옷부터 갈아입어.”

, 싫어.”

뭐라고?”

아니 그러니까, 됐어. 괜찮아. 감기 걸리는 편이 낫겠어. 독감 걸려서 당장 죽더라도 그게 좋겠어.”

뭐라는 거야? 내가 괜찮지 않아. 바닥에 빗물 흥건한 것 안 보이나? 빨리 갈아입고 오라니까.”

  워켄이 짜증스러운 기색으로 손을 쑥 내밀자 브라우닝은 으악, 하고 새된 소리를 내질렀다. 순간적으로 질끈 감았던 눈을 다시 떴을 때, 그가 일찍이 우려했던 것은 다행히도 보이지 않았다. 워켄의 손에는 지극히 평범한, 제가 입은 것과 비슷한 셔츠와 바지가 들려 있었다. 갑작스러운 비명에 놀랐는지 워켄은 동그랗게 뜬 눈으로 브라우닝을 쳐다보았다. 연유를 묻는 시선이었지만 브라우닝은 거기에 대답하는 대신 허둥거리며 말했다. 아니, , 빨리 갈아입고 오지, 미안하군. 그는 워켄이 불러 세우기도 전에 곳곳에 물을 튀기면서 재빨리 화장실로 사라졌다.

 

  소매에 프릴 달고 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몸에 남은 물기를 닦아내면서 브라우닝은 생각했다. 도대체 뭔데, 그 화려한 컬렉션은? 짧기는 왜 또 그렇게 짧고? 아무래도 미니스커트 같은데? 그러면 안 되잖아? 아니, 미니스커트라 안 된다기보다는. 왜 안 되냐면, 맙소사, 유혹? 유혹? 그건 되는 거야? 아니잖아, 그게 그건가, 뭐 사실 개인 취향이고 성향인데, 무슨 상관이야. 존중받아야 하는 거 아닐까. 그나 나나 굉장히 정당한 거 아니야 혹시? 두서없는 연상이 머릿속을 휘저었지만 그는 그것을 옳게 정렬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애초에 불가능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차분하게 심호흡을 하고, 셔츠에 팔을 꿰었다. 약간 바듯한 감은 있었지만 전체적인 체격 자체는 비슷했으므로 입을 만 했다. 걸친 옷에서는 세제와 알 수 없는 약품의 냄새가 뒤섞인 듯 묘한 향이 났다. 워켄에게서 흔히 나던 향이었다. 브라우닝은 다시금 얄팍하니 선이 고운 워켄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럴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솔직히 어울리기는 하겠지.

  본인이든, 누구든, 좋아할 만 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명백한 프라이버시의 영역이라는 것도. 항상 틀어박혀 연구만 하느라 스트레스가 많을 테니 그거 해소할 만한 남다른 취미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법도 해, 그럴 테지 물론. 그는 멋대로 납득했다. 그저 부단히 활동하기 시작한 제 상상력만 막으면 더 이상 문제될 것은 없었다. 때마침 머릿속에 떠오른, 짧은 치맛자락 아래로 드러난 흰 다리를 필사적으로 밀어내며 브라우닝은 마저 바지를 입었다. 얼굴이야 첫 술잔 들이킬 때부터 주욱 붉었어. 아무 문제없음! 절대! 그는 두 손으로 가볍게 뺨을 두드린 뒤 젖은 옷가지를 챙겨 화장실을 나섰다. 방에 가까워질수록 얼굴이 더더욱 달아올랐으나, 결국에는 감기가 오는 모양이라고 믿기로 했다.

 

고마워. 옷은 깨끗이 세탁해서 돌려주지.”

돌려줄 필요 없어.”

그거 선심 쓰느라 하는 말이지? , 말은 고맙고 그냥 내가 알아서 할게.”

브라우닝은 워켄이 무언가 덧붙이려는 것을 보고 황급히 말을 마무리 지었다. 그대로 내버려 두었으면 태연자약한 투로 버리라거나 태우라거나 하는 말을 들었을 지도 몰랐다. 그리 틀린 추측은 아니었는지, 워켄은 불만스러운 기색으로 입을 다물었다.

  걸레로 대충 훔쳐내긴 했지만 바닥은 여전히 축축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눅눅한 공기가 폐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다. 브라우닝은 그가 자리를 비운 새에 워켄이 준비해둔 머그잔을 집어 두 손으로 감쌌다. 갓 끓인 커피의 온기가 얇은 잔을 통과해 알맞게 전해졌다. 딱 기분 좋을 정도의 따뜻함이 손뿐만 아니라 온 몸을 데웠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나른했다. 몰려오는 졸음을 다 떨치지는 못하고, 그는 가물거리는 눈으로 반대편에 앉은 워켄을 바라보았다. 유독 창백한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더욱 뚜렷이 보였다. 오랜 시간에 걸쳐 뿌리내린 깊은 피로가 온 얼굴에 퍼져 있었다. 잠을 깨우지는 않았더라도 필시 연구는 방해했으리라, 브라우닝은 그제야 면구스러운 마음이었다.

큰 소리는 쳤지만 이미 방해할 대로 방해했겠군. 이거 미안한걸. 늦었지만 이제라도 가서 볼일 봐, 나는 죽은 듯이 잠이나 잘 테니.”

워켄은 긍정이나 부정으로 해석될 만한 의사는 일체 표하지 않고 두 눈만 껌뻑였다. 그렇다고 딱히 몸부터 움직일 생각도 없는 듯했다. 그는 그저 가만히 앉아서, 브라우닝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제 얼굴을 직시하는 시선이 버거워-게다가 그놈의 감기도 문제였다, 지나치게 열이 올랐다-브라우닝은 기우뚱 고개를 숙여버렸다. , 라고 물으면 간단할 일이었으나 그는 죄라도 진 듯 딴청이었다. 집요한 정적이 어색하게 느껴졌을 무렵, 워켄은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섰다. 혼자 남겨진 브라우닝은 제법 큰 소리로 안도의 한숨을 푹 쉬었다. 어쩌자고 이 불편한 자리를 자청했을까, 역시 지나친 음주는 좋지 않아. 그는 새삼스러운 교훈을 내세우며 소파에 벌렁 드러누웠다. 이제 잠이 들고 아침이 밝으면,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워켄에게 무례를 다시 사과하며 신세진 것을 고마워하고 다음 의뢰 디스카운트를 보장한 다음 안온한 사무실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었다. 부득이하게 목격한 워켄의 은밀한 취미쯤, 간혹 생각나는 일도 있겠으나 설마 시도 때도 없이 심란하진 않으리라 생각되었다.

  그래도 오버니삭스는 좀.

  브라우닝은 쿠션에 얼굴을 파묻었다. 끈질긴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얼굴을 흔들다보니 온통 상처가 쓸려 아팠다. 절로 끙끙대는 소리가 났다. 그가 자신과의 비장한 사투를 벌이고 있을 때, 주위의 고요를 뚫고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나 봐.”

돌아가서 연구에 매진하리라 생각했던 워켄이 어쩐 일인지 다시 와 있었다. 너무 시끄러웠나, 방금 전까지 마구잡이로 몸부림치던 사실을 떠올리고 브라우닝은 무거운 마음으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워켄은 차분한 얼굴이었다. 힐책하려는 기색은 찾을 수 없었다. 의아해하던 브라우닝은 뒤늦게, 워켄이 들고 있는 작은 구급상자를 발견했다. 워켄은 브라우닝 옆에 다가앉아 구급상자의 내용물을 하나 둘씩 풀어놓았다.

놔두면 흉질거야. 얼굴 가까이 대.”

아니, 더 이상 신세 질 수는 없지.”

이미 충분히 뻔뻔한 짓을 해놓고는 새삼. 다쳐서 의사를 찾아와놓고 치료도 하지 말라니 그것도 웃기는 노릇 아닌가.”

알코올이 묻은 거즈가 상처를 닦아냈다. , 작게 신음하는 브라우닝을 무시하고 워켄은 밉살스러울 정도로 단호하게 치료를 계속했다. 눈물이 찔끔 나도록 아팠으나 이것이 설령 워켄의 고의적인 보복이라 해도 브라우닝으로서는 할 말이 없었다. 게다가 보복이라기에는, 무척 정성스럽고 세심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는 워켄의 손길에 순순히 상처를 내맡겼다. 워켄이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긴 머리칼도 덩달아 물결처럼 찰랑였다. 은은한 자색의 눈동자가 흡사 보석같이 따스하고 우아한 빛을 띠었다. 브라우닝은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나는 아무래도 리타보다 당신이 좋다.”

?”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워켄은 의아쩍은 얼굴로 브라우닝을 바라보다가 이내 치료에 집중했다. 브라우닝은 몰려오는 잠 때문에 꼿꼿이 얼굴을 들고 있는 데에 애를 먹어야 했다. 자꾸 기울어지는 고개 때문에 워켄의 잔소리도 빈번했다. 아무려면 어떠랴, 좋은 게 좋은 것인데. 몸 따뜻하고 잠은 오고 옆에는 이쁜이도 있고. 브라우닝은 히죽 웃었다. 나사가 풀린 듯한 그 웃음은 역시 보기 좋을 것은 아니었다. 남이 보면 놀랄 만도 하겠다고 그도 스스로 인정했다. 그러므로 그는, 순간 놀란 워켄이 핀셋으로 눈을 찌른 것도 제 잘못 때문이라 시인했다.

   잠깐 소란이 있었지만 워켄은 능숙한 솜씨로 무사히 치료를 끝냈다. 브라우닝은 다시 소파에 드러누우며, 처음 문을 열어주었을 때보다 곱절은 피곤해 보이는 워켄에게 속 편한 인사를 보냈다.

"잘 자라고, 워켄.”

…그래, 부탁이니 빨리 자.”

안 그래도 그럴 셈이야. , 근데 말이지.”

또 뭐야?”

공기가 좀 찬 것 같은데.”

워켄은 부득 이를 갈더니 연구실에서 제 가운을 들고 나와, 두 다리 쭉 펴고 드러누운 브라우닝에게 사나운 기세로 던져주었다. 아무리 불평해봤자 더 줄 것은 없다는 거센 분노의 표현이었겠지만, 브라우닝은 얄팍한 가운 한 장에 두꺼운 모포를 받은 만큼이나 만족한 모양이었다. 실실 웃는 브라우닝의 얼굴을 보며 워켄은 짧게 신음하고는 연구실로 사라졌다. 꾸준한 소란이 사라지자 그와 대비되는 안락한 고요가 찾아들었다. 어느덧 비가 멎은 듯 바깥은 희미한 새소리를 제외하고는 조용했다. 커튼 너머로 어렴풋한 빛의 흔적이 보였다옷가지에 밴 다른 이의 향취가 브라우닝의 마음을 편안하게 가라앉혔다. 외로움이니 서러움이니 하는 것들도 어느새 기억 저편으로 멀찍이 물러나 있었다. 그는 가물거리는 정신을 추스르며 멍하니 생각했다. 리타보다 당신이 좋다는 말은 주사나 아첨은 아닐 모양이다, 당신이라면 여섯 번은 고사하고 백 번도 거절하겠지만, 하긴 어차피 한 번 데이트 할 시간도 없겠지만, 그래도 그 옷들 다 입어보는 시간 조금씩만 쪼개면 한번 쯤은 나와 어울려 줄 수 있지 않을까, 글쎄, 어떠려나. 

하여간에 재밌는 사람이다, 당신은.

아주 흥미로운 의뢰인이지, 당신과 있으면 권태롭지 않아. 그래서야. 그 뿐일 테지만.

그래도, 어쩌면.

모호한 생각의 끝을 뭉뚱그리며, 이번에야말로
, 브라우닝은 서서히 편안한 잠 속으로 잠겨들었다.
  그는 그날 꿈을 꾸었는데
, 꿈속에서 워켄은 빨간 고딕드레스에 줄무늬가 들어간 오버니삭스를 신고, 빨간 머리띠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꿈속이었기 때문인지, 브라우닝은 별로 이상하다는 생각도 못하고 마냥 흐뭇하게 워켄을 바라보고 있었다.

 

  또 어쩐 일이지? 아직 의뢰를 다 마치지는 못했을 테고.”

, 오늘은 의뢰 문제가 아니야. 생일이라고 들어서.”

오늘? 이런, 나도 잊고 있었던 것을 용케 알았군.”

당신은 나한테 중요한 고객이니까. 고객서비스 겸, 간단한 축하랑 선물을 전하러 왔지.”

신경 쓸 필요 없었는데. 당신이 말해주지 않았으면 어차피 기억도 못했을 거야.”

섭섭한 소리 말고, 이왕 가져왔으니 받아.”

이건드레스인가?”

어울릴 것 같아서.”

예쁜걸. 고마워.”

좋아할 줄 알았어.”

그런데 좀큰데? 길이도 긴데다가.”

너무 짧게 입어도 좋을 것 없다고. 나름대로 어렵게 구한 거야, 맞는 사이즈 찾기가 어려워서.”

그런가? 그렇게 드문 사이즈는 아닐 텐데.”

그럴 리가.”

아니 그보다, 당신이 사이즈는 어떻게?”

, , , 아니, 뭐야, 있잖아 남자의 직감.”

흐음아무튼 고마워. 굳이 생일 선물까지 챙겨주고. 고마워서라도 어서 힘을 내야겠는데. 기다려, 당신한테는 꼭 입은 모습을 보여 줄 테니.”

아니, 아니, 아니! 정말로 됐어. 괜찮아.”

그렇게 거부할 필요 까진분명히 예쁠 텐데.”

그럴 거야, 나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만 됐어. 정말.”

“? 그래 뭐 그렇다면야…….”

그래도 이건 너무 긴데.

도니타, 너도 쑥쑥 자라서 이 옷이 맞을 정도가 된다면 좋겠구나. 결국 그럴 수야 없겠지만……. 워켄은 프릴이 잔뜩 달린 보라색 드레스를 둘러보며 부드럽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