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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온식스] 무제

로이비 2013. 8. 13. 23:59

-진단메이커 rt연성. rt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잘 벼른 예리한 칼날이 거세게 맞부딪쳤다. 쇠가 스치는 굉음과 사람의 비명이 연달아 울렸다. 욕설과 애원의 주체는 몇 번 공격이 오가다 보면 흔하게 바뀌었다. 서로 목숨을 내놓고 대립해도, 칼끝에 꿰일 때는 그리 다를 바 없는 모양새였다. 사내들은 의미 없는 고함을 내지르며 죽고 죽이는 것에 몰두했다. 피 묻은 갑판이 흉흉하게 번들거렸다.

  아수라장과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자유호의 일등항해사인 식스는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입술을 힘주어 깨물고 있었다. 급작스럽게 벌어진 전투는 그간의 부주의를 정산하듯 몇몇 사상자를 내었다. 사실 부주의는 철저하게 식스 혼자서 내린 정의였다. 아무리 노스윈드와 대적할 세력이 절멸하다시피 해도 드넓은 바다를 누비다보면 약간의 변수는 있기 마련이었다. 가령 오늘과 같이, 배 한척뿐이 남지 않은 어떤 해적 무리가 안개 속을 표류하다 말고 화끈하게 자살할 요량으로 자유호에 돌진해 오는 사태가 그랬다. 결코 그의 역량이 부족해 일어난 사태가 아니었음에도, 식스는 어쭙잖은 자들이 자유호의 갑판을 밟도록 허락한 데에 뼈저린 책임을 통감했다.

  적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어떻게든 성공만 한다면 제국의 공적 1호에게 걸린 현상금과 악명 높은 마법검을 얻을 수 있으니 이왕 내놓기로 한 목숨에는 괜찮은 도박일는지도 모른다. 비록 낙관이 불가능한 확률이지만, 그래도 그들은 운이 나쁘지 않았다. 치밀한 계산 따위는 전혀 없었음에도 절묘한 풍향과 안개가 강철의 레이디의 발포를 막아주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식스는 늦지 않게 전투준비를 끝내었으나 미처 근접은 피할 수 없었다. 살아 돌아가기만 한다면 그들은 자유호와 접전을 치른 대해적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 이상의 요행을 허락할 식스가 아니었다. 그들의 영웅담은 육지까지 이르지 못하고 이 바다 아래에 수몰될 것이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잦은 비명도 차츰 뜸해졌다. 여태 몸을 세우고 있는 이들은 대부분 자유호의 선원이었다. 낯선 얼굴의 사내가 둘쯤 더 고꾸라졌을 때, 식스는 물고 있던 입술을 놓았다. 이제 마무리만 잘 하면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었다. 더 이상의 변수는 없이…….

  식스의 호령이 울려 퍼지기 전에, 갑판 한 편에서 쇠가 바닥을 치는 요란한 소리가 났다. 칼을 떨어뜨린 남자는 피가 배어나오는 손목을 움켜쥐며 주저앉았다. 그의 앞에는 몸 곳곳에 피 얼룩을 묻힌 라이온이 한가로운 얼굴로 서 있었다.

 

좀더 힘좀 써보라고. 노스윈드의 극진한 손님맞이에 대한 화답이 겨우 이거야? 혹시 평소에 베푸는 데에 좀 인색하다거나 감정이 무디다는 소리 듣지 않아? , 괜찮아. 얼굴 보고 얼추 짐작은 했어. 솔직한 말로 차라리 샌님에 가깝지 그리 호남형은 아니잖아? 아마 본인이 보기에도 그럴 텐데.”

 

  갓 전투를 마친 상황에서도 경이로울 정도로 주절대는 라이온을 보며 식스는 이마를 짚었다. 그는 당장 상황을 마무리 짓지 않는 라이온의 방만함에 대해 속으로 불평하다가, 혹시 모르니 하나쯤은 추궁해보는 편이 좋을까 하는 계산을 떠올렸다. 길지 않은 고민 끝에 우선 생포를 결심한 식스가 라이온 쪽으로 몸을 움직였을 때였다.

라이온의 추론을 잠자코 듣고 있던 남자가 불쑥 다치지 않은 손을 놀렸다. 약간 떨어진 거리에 있던 식스의 시야에도 햇빛을 부수는 차가운 날붙이가 선명하게 들어왔다. 남자는 품속에 넣어둔 단검을 제 가슴 쪽에 겨누었고, 순식간에 얼굴을 굳힌 라이온이 그 위로 달려들었다.

  자결을 막으려던 라이온의 동작은 손쉽게 달성되었다. 남자의 본래 의도가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라이온의 손이 단검을 끌어당기자, 남자는 저항하는 대신 팔에 힘을 실었다. 순간 호를 그리며 반 바퀴쯤 돈 검 끝이, 그대로 라이온의 옆구리에 꽂혔다. 식스를 비롯한 자유호의 선원들은 찰나의 순간 동안 싸늘하게 얼어붙어 움직이지 못했다. 식스의 머릿속에는 부주의라는 단어가 발악처럼 맴돌았다. 걷어차서 떨어뜨리는 편이 안전했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이것들이 침입하도록 용인하지 않았더라면. 그가 피가 식는 느낌을 받는 사이 라이온은 비척이며 몸을 뒤로 뺐다. 갓 살을 뚫고 나온 선혈이 노을빛과 뒤엉켜 타오르듯 반짝였다.

  현저히 흐트러진 자세로도 그는 정확히 단검을 쳐내었다. 급박한 상황에 모든 것은 더디게만 흘렀다. 주춤거리는 선원들이나, 불과 한 걸음 정도를 사이에 두고 대치중인 라이온과 남자도 적막을 부풀릴 뿐 움직이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가장 먼저 행동한 것은 현장에서 벗어나 있던 식스였다. 그는 지시를 내리는 대신 직접 칼을 거머쥐고 재빨리 갑판에 내려섰다.

  라이온의 앞을 막아선 식스가 지체 없이 팔을 휘둘렀다. 한차례 큰 궤도를 그린 칼은 정확하게 남자의 몸을 갈랐다. 왈칵 솟구친 피가 채 물러나지 못한 식스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남자는 둔탁한 소리를 내며 쓰러진 뒤 조금 꿈틀대더니 다시 일어서지 않았다. 그제야 굼뜨던 시간도 올바르게 움직였다. 선원들의 노한 음성이 뒤늦은 소란을 일으켰다. 누군가의 거친 욕지거리를 들으며 힘겹게 숨을 몰아쉬던 식스는 다급한 몸짓으로 돌아섰다. 어느새 갑판에 주저앉은 라이온이 옆구리를 누른 채 나직이 신음하고 있었다. 창백하게 질린 식스는 잘 움직이지 않는 입을 어렵사리 달싹거렸다. 그러나 뜻밖에도 라이온의 말이 한 박자 빨리 튀어나왔다.

 

새끼말은 참 잘도 들어먹네. 힘좀 써보랬다고 진짜 쓰냐.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건 흔해 빠진 선입견이라 이건가. 그래도, 우리 아버지도 안 쓴 훈육 방법을 건방지게.”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모여들었던 선원들이 하나 둘 실소를 터뜨렸다. 땀과 피로 범벅된 초췌한 모습이기는 했으나 라이온은 여전히 익살과 여유를 잃지 않았다. 오히려 곧 혼절할 얼굴을 한 것은 식스였다. 핏기가 싹 가신 일등항해사를 보며 선원들은 약간의 불안을 느꼈다. 평소처럼 그저 몇 마디 핀잔을 주고, 얼른 붕대를 가져오라 명령하면 좋으련만. 하지만 그들의 바람과는 달리 아무런 지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식스는 아직 칼을 쥐고 있었다. 미세하게 떨리는 칼끝이 맺혀있던 핏방울을 부지런히 떨어뜨렸다.

우두커니 서서 미동도 않는 식스를 보고 라이온이 숨을 헐떡이며 말을 이었다.

 

 “식스, , 아주 터프했어요. 쿨럭, 해적이 웬 말입니까, 어디 근사한 나이트 같았다고요. 물론 제가 공주 역할을 맡기는 메스껍겠지만그보다 이거, 역시 혼날까요? 입을 다 막아버렸으니. , 그래도 걱정 마십쇼. 선장님께 보고 드리러 갈 때후우, , 같이 가줄 테니까-”

진지할 때는 좀 진지해져라, 이 멍청아!!”

 

  돌연 터져 나온 험악한 고함에 일순간 모두가 침묵했다. 잔뜩 찡그린 얼굴을 하고도 끝내 말하기를 포기하지 않던 라이온 역시 당장 입을 다물었다. 한바탕 소리를 내지른 식스는 아까보다도 세게 입술을 깨물고, 그대로 등을 돌려 빠르게 갑판을 가로질렀다. 문이 부서질 기세로 쾅 소리를 내며 닫힐 때까지 누구 하나 그를 붙잡으려 하지 않았다. 식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라이온은 얼빠진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다른 선원들이 애달픈 시선을 보내왔지만 그 역시 어깨를 으쓱이는 진부한 제스처밖에 돌려줄 수 없었다. 새삼스럽게 통증이 밀려오는 듯, 상처를 감싼 손이 움찔거렸다.

  돛을 뒤흔들던 바람이 멎었다. 바다냄새와 뒤섞여 조금이나마 희석되었던 피비린내가 한층 진하게 풍겨왔다. 피와 시체로 엉망진창인 갑판을 보며 라이온과 자유호의 선원들은, 선장도 일등항해사도 없이 흡사 부모에게 버려진 꼴로 도무지 감당이 안될 만큼 막연한 기분을 느꼈다.

 

 

  안개나 바람이나 항해하기에 그리 좋은 날씨는 아니었지만 나름 안온한 오후였다. 밤으로 접어들기 직전, 노을은 가장 짙은 농도로 빛나며 수평선을 붉게 물들였다. 페가서스 호의 선장 하리야는 오랜 뱃사람도 경탄을 아끼지 않을 풍경을 바라보며 소리 없는 기도를 올렸다. 그의 기도는 비단 동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용기보다는 만용으로, 살해보다는 자살로 평가될 기습이었으나 하리야는 적들의 영혼 또한 주님께서 잘 돌보시리라 믿었다. 지금쯤이면 그들의 육신도 육지만큼이나 자비로운 바다로 돌아갔을 것이다.

  예상치 못한 전투에 필요 이상의 손실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전투 규모 자체가 작았다. 자유호에서 벌어진 일이긴 하나 키 드레이번과 복수는 아예 참전을 하지 않았으며-마침 물수리호에 가 있는 상태이기도 했지만-그랜드마더호, 그랜드파더호의 지원도 없었다. 뒤처리 역시 다르지 않았다. 페가서스호 뿐만 아니라 다른 배들에도 달리 분주한 기색은 없었다. 아마 지금 골머리를 앓는 것은 자유호의 고급 선원들, 일등항해사인 식스와 갑판장인 라이온 외 몇 명 정도가 다일 것이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하리야는 흘러나오는 한숨을 미처 참을 수 없었다. 한참 자유호의 갑판을 뛰어다니며 거품을 물고 있어야 할 갑판장이 페가서스호의 구석을 차지하고 앉아 밥그릇을 긁어대는 탓이었다. 묽게 끓인 스튜를 알뜰하게 비운 라이온은 흡족한 표정으로 저도 모르게 배를 두드리고 곧 숨 막히는 소리를 냈다. 그 꼴을 지켜보던 하리야가 방관하기를 그만두고 물었다.

 

 “식사를 마쳤으면 이제 자네가 왜 여기 있는지 물어도 큰 실례는 아니겠군.”

 “선장님과 저 사이에 실례라니요, 야속한 말씀 마시죠. 그리 거리를 두고자 하셔도 제 마음으로는 선장님을 포기 할 수 없는 바

애틋한 와중에 미안하네만 자네와 자유호 선원들을 위해서라도 이 이상은 묵살하는 편이 좋겠군. 아까 일어났던 전투를 생각하면 다른 누구보다도 갑판장이 한창 바쁠 때라 생각되는데. 이건 직무태만인가? 내게도 이 정도 지적을 할 자격은 있겠지.”

 

  라이온은 청승맞은 얼굴로 입술을 삐죽였다. 노스윈드 선단을 통틀어 식스 일항사를 제외하고는-혹은 그와 비슷한 정도로-점잖고 엄격한 하리야는 라이온의 궤변에 호락호락 넘어가주지 않았다. 단단한 침묵에 등이 떠밀린 라이온은 어쩔 수 없이 양 손의 검지를 머리 옆에 세워보였다.

 

그렇지만 식스-일항사님, 무지하게 화가 났다고요. 지금 자유호에 돌아갔다간 시체를 치울 게 아니라 그들하고 동행이 될 처지란 말입니다.”

 

  그는 비통하게 자신이 처한 운명을 열변했다. 얌전히 관객 역을 맡았던 하리야는 박수갈채대신 커다란 한숨을 돌려주었다.

 

라이온, 일항사와 문제가 있을 때마다 페가서스호에 친정집 도망 오듯 쫓아오는 건 좀 자제해줬으면 좋겠네.”

 

친정집? 하리야에게 이 정도로 신랄한 비유를 들을 수 있는 것은 분명 라이온이 유일할 터였지만, 그는 자신의 성과에 기뻐하는 대신 헛웃음을 흘렸다.

 

친정어머니 같은 심려를 느끼실 줄은 차마 몰랐군요. 죄송합니다.”

 

  하리야는 별 대꾸가 없었다. 그때 머쓱한 얼굴을 한 선원이 다가와 꾸벅 정중한 인사를 하고는 하리야에게 등불을 내밀었다. 어느새 느지막한 저녁식사가 모두 마무리되고 밤이 더욱 가깝게 찾아와 있었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이 어둑한 하늘을 올려다보던 라이온은 문득 푸념하듯이 말했다.

 

식스가 저더러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뭐라 하던가?”

멍청이라더군요.”

저런.”

 

  비록 단조로운 추임새이기는 했으나 하리야로서는 나름 심각한 기분으로 대꾸한 것이었다. 식스의 입장에서 멍청이가 얼마나 수위 높은 비난인지, 얼마만큼 분노를 터뜨린 것지 익히 짐작이 되었다. 자세한 경황은 몰라도 라이온이 당장 도망을 올 정도로 사태가 중하긴 했던 모양이었다. 하리야는 두 사람에게 조금씩 측은한 마음을 보내다가 자유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나 둘 켜지기 시작한 불빛이 어지럽게 휘청거렸다. 간간이 오가는 고함은 거칠고 어딘가 힘이 없었다. 때 아닌 갑판장의 부재가, 싸움에 지친 그들을 더욱 괴롭히고 있으리라.

  단순히 명령체제나 인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좀 과하다는 평가를 듣기는 해도 라이온은 언제나 요령 좋게 유쾌하고 즐거운 분위기를 이끌었다. 그가 없는 자유호는 차분하다 못해 고즈넉하기까지 했다. 거기에 냉랭한 일등항해사까지, 한참 신경이 곤두 선 선원들은 난처하고 마뜩찮은 상태로 핏자국을 닦아내는 수밖에 없을 터였다.

  식스가 아무리 화가 났기로서니 자신의 감정만으로 배의 사기를 떨어뜨릴 인물은 결코 아니었다. 라이온이 슬쩍 배에 기어올라 넉살좋게 선원의 등을 후려친다면, 떠들썩한 웃음과 볼멘소리를 들으며 결국은 식스도 기분을 누그러뜨릴 것이다. 하리야가 아는 사실을 두 사람이 모를 리가 없었다. 때맞춰 대답과 같은 라이온의 말이 들려왔다.

 

 “하리야 선장님 말대로, 여기도 참 자주 드나들지 않았습니까.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긴 하지만 이렇게 정색하고 화를 낸 적은 그간 없었다고요. 원체 제 재롱도 성미에 안 맞아 하니 달리 기분을 풀어줄 수가 생각이 안 납니다. , 진지할 땐 좀 진지해지라는 말도 들었지요.”

 

  왜 화가 났을까요? 지금까지의 숱한 행태를 볼 때 가히 언어도단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물음이었다. 라이온이 식스의 복장을 뒤집는 데에 얼마나 많은 정성을 쏟는지 알 사람은 다 알았다. 하리야는 철저히 기만당한 식스를 위해 속으로 짧은 기도를 올린 다음, 시무룩한 얼굴의 라이온을 훑어보았다.

 

듣자하니 다쳤다던데.”

 

  라이온은 그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생각났다는 듯 부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몸을 뒤틀었다. 셔츠를 들추자 엉성한 붕대가 드러났다. 도와주는 사람 없이 혼자 조치한 것인지 헐겁게 묶인 붕대가 약간 흘러내렸다. 상의며 하의며 할 것 없이 꾸준히 배어나온 피에 젖어 온통 얼룩이 져 있었다.

 

부상이라기 쪽팔린 수준인데 엄살을 부릴 수야 없지 않습니까. 이렇게 밥도 잘 넘기는데요. 물론 찔렸을 당시에는 약간 쇼크 증세도 있고 그랬지만, 대충 침 발라 두니까 알아서 낫더군요. 진짜, --짜 얕게 찔렸단 말입니다.”

곧장 페가서스호로 옮겨와 밥 타령을 할 정도니 나도 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하지 않았나. 위험했다고. 조금만 더 깊게 들어갔으면 죽을 수도 있었네.”

 

  라이온이 장황한 죽음의 철학을 늘어놓기 전에 하리야는 단호한 헛기침을 내뱉었다. 또 한 번 기회를 뺏긴 라이온은 크나큰 낭패를 본 사람처럼 입술을 우물거렸다. 진지할 땐 진지해 지라잖나, 식스의 근심을 십분 이해한 하리야가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왜 화가 났느냐고? 두 사람의 싸움 아닌 싸움에 끼어 졸지에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처지가 되었다 생각하면서도 하리야는 반쯤 체념한 채 친절을 베풀었다.

 

일항사가 많이 놀란 모양이더군. 자넬 무척 걱정하고.”

 

  또다시 닥쳐올 농설을 경계하던 그의 노력은 라이온이 입을 다무는 통에 무색해졌다. 라이온은 깐죽거리거나 빈정대는 대신 멍한 얼굴로 하리야를 쳐다보았다. 전혀 예측하지 못한 반응에 놀란 하리야는 자신이 한 말을 되씹어 보았으나 크게 실언이라 생각할 부분은 없었다. 응당한 반응 없이 라이온은 당최 뜻을 짐작하기 어려운 표정으로 멀거니 앉아 있었다. 갑자기 귀머거리라도 된 양,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한 양 시치미였다. 이건 또 무슨, 칼로 잘라낸 듯 갑자기 끊어진 대화가 거북한 공기를 만들어냈다. 묘한 정적은 시작이 그러했듯 라이온이 불쑥 입을 여는 것으로 갑작스럽게 끝났다.

 

걱정이요?”

그래.”

왜요?”

 

  이번에는 하리야가 당황할 차례였다. 왜요 라니. 라이온은 물론 여러모로 말이 안 통하는 상대이긴 했지만 괴짜일 뿐 멍청이는 절대 아니었다. 하리야로서는 라이온이 뜬금없이 멍청이 흉내를 내기 시작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대화의 여백에서 모호한 은유나 숨겨진 의미를 찾아낼 필요도 없이, 모든 것은 이미 나오지 않았던가. 아주 명백하게.

 

자네가 죽을 뻔 했다는 이야기를 내가 다시 해줘야 하나?”

 

  라이온은 일생의 난제와 직면한 기색이었다. 도통 앞과 뒤를 연관시키지 못해 헤매던 그는 마침내 하리야가 설명하고자 했던 하나의 명제를 완성시켰다. 내가 죽을 뻔 했고, 그래서 걱정했다고? 그 해결이 개운함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킨 모양이었다. 영문을 알 수는 없었으나, 여태껏 보인 적 없던 모습으로 당혹스러워 하는 라이온이 다시금 평정을 찾도록 하리야는 참을성 있게 기다려 주었다.

  잔잔한 파도가 간혹 속삭이는 것 같이 뱃전을 스쳤다. 자유호의 일도 얼추 마무리가 되었는지 주위는 한결 단단한 고요에 휩싸여 있었다. 잠이 찾아오기 딱 알맞았다. 하리야는 가물거리는 눈을 두어 번 비비고 라이온을 바라보았다. 줄곧 허공을 응시하던 라이온이 손을 들어 엉망으로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완연한 어둠 속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안색이 파리했다. 바람소리 같은 한숨이 흘렀다.

 

평생 나 죽길 고대하는 사람만 수두룩하게 봐 와서, 반대 경우는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아니, 우리가 현상금 걸린 수배자에 악명 높은 해적인 건 맞지만 아무리 그래도 다들 죽기만 바랄 리야 있나?”

 

  해적? , 그렇죠. 기가 막힌다는 투로 반문하는 하리야에게 라이온은 얼빠진 소리를 했다. 대강 원인은 파악했지만 여전히 지지부진하고 맥없는 대화에 지쳐 하리야가 혀를 찼다. 이 젊은이는, 타인의 걱정이라는 게 어색할 정도로 해적으로서의 삶을 삭막하게 살아왔나. 자신도 결코 다르지 않은 처지였으나 그는 잠시 진심 어린 연민을 느꼈다.

  아무리 그래도 상태가 이상하군, 멀쩡했던 적도 없지만. 혹시 부상 때문인가 하는 우려는 뒤늦게야 떠올랐다. 아무래도 이제 그만 돌려보낼 때였다.

  하리야는 생각에 빠져든 라이온을 두고 몸을 일으켰다. 선장실 대신 갑판 아래 창고로 향했던 그는 잠시 뒤에 다시 나타났다. 갑판 위에 올라선 그의 손에는 붉게 출렁이는 적포도주 한 병이 들려 있었다.

 

라이온 갑판장, 이만 자유호로 돌아가게. 이건 친애로 하는 권고지만 지금 따르지 않는다면 명령이 되겠군.”

끄응차, 안 그래도 일어날 참이었습니다. 더 폐를 끼칠 수는 없으니 씨알도 안 먹힐 재롱이나 부리러 가봐야지요.”

 

  라이온은 짧게 푸념하면서 굼뜬 동작으로 몸을 일으켰다. 잔뜩 굳은 몸짓을 지켜보던 하리야가 돌연 포도주병을 공중에 띄웠다. 가볍게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술병은 깨진 곳 없이 가까스로 라이온의 손에 안착했다. 무사히 받아내긴 했으나 그러기까지 큰 고통을 감수해야 했던 라이온은 병을 꼭 쥐고서 억울하다는 뜻을 담아 앓는 소리를 냈다. 그의 고통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은 하리야가 무심하게 말했다.

 

 “위로선물일세. 가져가게.”

으윽, 환자에게 술을 주십니까?”

아니었으면 럼주를 빼 갈 생각이었잖나.”

 

  미수로도 진행되지 못하고 그저 생각으로만 남은 유혹적인 절도를 아쉬워하며 라이온은 하리야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잘 화해하기를 바라네, 하리야의 담담한 응원에 친정어머니 같은 조언 감사합니다하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오르는 것을 어렵게 막아두고 좋은 밤 되라는 인사를 마친 라이온은 천천히 보트를 내렸다.

 

  고작 몇 시간 전의 소동은 온데간데없이 자유호는 평화로운 밤을 아낌없이 누리고 있었다. 두런거리는 소리보다 잠든 이들의 숨소리가 더욱 흔히 들릴 듯한 고요 속에서, 일등항해사 식스는 홀로 뱃전에 서 있었다. 잘못과 책임을 들어 몸소 불침번을 서겠다는 일등항해사를 선원들은 한사코 만류했지만, 그는 끝끝내 고집을 부렸다. 결국 전투의 뒷정리가 다 끝나고 충분한 휴식을 명령받은 선원들이 모두 물러간 뒤 식스만 남겨지게 되었다.

  사실 쉴 새 없는 전투 지휘와 판단, 온갖 명령으로 다른 누구보다도 피곤할 것이 자명했지만 그의 자세는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뒷짐을 지고 곧게 선 그는 엄격하게 바다를 둘러보았다. 시야를 가득 메운 바다에 수상한 낌새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방심할 수 없었다. 그리 흔치는 않아도 습격은 있고, 모름지기 습격은 불시에 일어나는 법이다. 아까같이, 만약에라도 또 그런 일이 일어나면. 순간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괴로움에 억누른 숨소리가 속 깊은 곳에서부터 나직이 울렸다.

  그때 파도소리와는 조금 다른 이질적인 것이 귓가를 때렸다. 노가 삐걱대며 부지런히 물살을 가르는 소리였다. 그것이 점점 가까워지는 줄을 알고도 식스는 놀라지 않았다. 그는 소리가 충분히 커질 때까지 기다리며 눈앞의 어둠을 마저 바라보다가 등불로 아래를 비추었다. 작은 보트는 어느덧 자유호 가까이 닿아 있었다.

  노를 내려놓은 라이온은 가만히 식스를 올려다보았고, 식스 역시 묵묵히 그 시선을 받아내었다. 어떤 의사도 없이, 오직 무언의 응시만 이어졌다. 희미한 불빛에 의지해 두 사람은 뚜렷하지 않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라이온이 어설픈 웃음을 지은 채 입을 열었다.

 

일항사님, 승선허가 좀 해주시겠습니까?”

 

  식스는 눈을 내리깔 뿐 대답이 없었다. 누가 보면 가관이라 할 것이다. 갑판장이 정중하게 승선허가를 구하는 것도 모자라 심지어 거부당할 가능성까지 농후한 초유의 사태였다. 정 안 되면 물수리호에 자리라도 깔아야 하나, 라이온의 걱정과는 달리 잠시 후 줄사다리가 아래로 내려왔다. 명확한 말은 없었지만 거부보다는 허가로 받아들이는 편이 합당했기에, 그는 순순히 사다리에 몸을 실었다.

  그가 사다리를 다 올랐을 즈음 식스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흡사 껴안듯이 감기는 팔에 놀라 어, 하고 소리를 낸 것이 화근이었다. 라이온은 딱딱하게 굳은 식스의 얼굴을 보고서야 그가 무엇을 염려하는 줄 깨달았다. 이런 부축이 필요할 정도로 다쳤다면 애초에 기어나가지도 못했을 거라 항변해봤자 옳게 들을 것 같지도 않았다. 많이 놀란 모양이더군, 무척 걱정하고. 라이온은 하리야의 말을 반추하며, 불명확한 소리로 괜찮다고 웅얼거렸다.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한층 힘이 실린 팔이 조심스럽게 몸을 받쳐올 뿐이었다.

  무사히 갑판을 디딘 두 사람은 뱃전에 등을 대고 나란히 앉았다. 자유호의 선원들이 보초가 하나 더 늘었다는 사실을, 그것도 갑판장이 합류했다는 것을 알면 더욱 송구해 하겠지만 밖으로 나와 보는 이는 없었다. 두 사람의 조우는 다른 사람들의 잠을 조금도 방해하지 않고 잠잠하게 이루어졌다.

  식스는 가지런히 모은 무릎에 팔을 댄 채 고집스러우리만큼 함구했다. 언제나 유지하던 엄격함이 조금 무너지고 그 빈자리를 피로와 음울함이 메웠다. 라이온은 잠자코 그 변화를 지켜보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그는 괜스레 제 머리를 헤집고, 입을 몇 번 달싹이다가, 번뜩 생각난 듯이 허리춤에 매달아둔 포도주병을 꺼내 들었다. 식스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그가 뭐라 쓴 소리를 하기도 전에 라이온이 서둘러 말했다.

 

하리야 선장님이 주신 겁니다. 위로선물이라고요. 저는 입도 벙끗 한 적 없어요.”

 

  확실히 하리야의 이름은 훌륭한 신뢰성을 가졌다. 그것은 곧 그만큼의 배신이기도 했다. 식스는 잠깐 동안 씁쓸한 얼굴로 페가서스호를 건너다보았다. 맨손으로 낑낑대던 라이온이 코르크를 빼내자 식스가 곧장 그것을 낚아챘다. 지극히 해적답지만 절대로 본인답지는 않은 동작으로 병째 술을 들이키는 식스를 보며 라이온은 실없이 웃었다. 이것 봐, 터프하다니까.

  꽤 오래 입에 댄 술병은 그새 한 뼘 정도 비어 있었다. 길게 내쉰 숨에 미미한 술냄새가 섞였다. 술의 도움인지 마냥 이어질 것 같았던 식스의 머뭇거림은 그리 길지 않았다.

 

몸은 좀 괜찮나?”

 

시선이 포도주병을 향하고 있어 언뜻 보아서는 혼잣말 같았다. 하지만 자신이 질문의 대상이 된 줄을 잘 아는 라이온은 식스의 옆모습을 살피며 얌전히 대답했다.

 

보시다시피요. 아무리 저라도 꾀병 부리며 들어오기가 차마 양심에 거리낄 만큼 멀쩡합니다.”

미안하네.”

 

  라이온이 평소에 식스에게 들어온 말들을 분류해보자면 대개 구박과 핀잔이었다. 그 중에 사과랄 것은 없었다. 나중에 어느 때라도 들으리라 기대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듣자 라이온은 일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취기가 오르기에 적포도주는 너무 순한 술이었다. 그러나 고통으로 흐려진 식스의 얼굴은 차라리 취기라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라이온은 속 깊이 탄식했다. 덜 진지해도 될 땐 좀 덜 진지해지란 말입니다. 애석하게도 마음 속 조언은 전해지지 않았다. 이어진 식스의 말은 더욱 무겁고 진지했다.

 

명백히 내 불찰이야. 선장님이 부재해 계신 틈에 습격을 허락하고, 자네까지 위험에 빠뜨렸어.”

, 별 소릴 다 듣겠군요. 미친놈이 미친 짓 한 것을 식스가 왜 책임집니까?”

 

  적어도 라이온이 해서 될 말은 아니었다. 그는 잠시나마 식스의 얼굴에서 괴로움이 싹 가신 것을 기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고전적이고 조잡한 방법을 택한 식스는 작은 헛기침으로 대화를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 남들이 뭐라 말하든 일등항해사로서 변명의 여지는 없네. 물론 자네도 전투에 임하는 자세로는 경솔했지만아니, 아니야. 내 탓이 맞아.”

 

  남은 포도주가 병을 때리며 맑은 소리를 냈다. 다시금 술병을 기울이는 식스를 보고 라이온은 아까 벌어진 전투는 떠올렸다. 칼날이 살을 찢는 섬뜩한 감각은 여러 번 겪는다고 익숙해질 종류가 아니었다. 사람이 사람에게 가지는 적의도, 살의도 마찬가지였다. 죽어 없어지기 전까지, 살아가는 동안에는 계속 겪어야 할 일이었다. 그러도록 태어났으므로.

  더불어 고통에 주춤하는 사이, 빠른 속도로 달려온 식스도 기억했다. 힘이 빠진 몸을 끌어당기며 잘 쓰지도 않던 칼을 두려움이나 망설임 없이 휘두르는 모습도 선명했다. 라이온은, 비로소 식스가 유난히 화를 냈던 이유를, 비록 실감하지는 못했으나 객관적으로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문득 지독하게 슬퍼졌다.

 

저를 살려주지 않으셨습니까.”

 

  어렵사리 흘러나온 라이온의 말은 어딘가 기묘한 뉘앙스를 가지고 있었다. 구하고 도운 것에 대한 은혜보다는 죽인다는 행위의 반대항으로써 강조된 느낌이었다. ‘그러면 죽여줬겠나?’ 하고 농담 삼아 반문해도 별로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물론 식스는 엄격한 사내였으므로 그러한 농담은 선택지에 두지 않았다. 할 말이 하나뿐이었기에 그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단호했다.

 

그거야 당연하잖아. 자네는

 

  그러나 그의 대답은 뚝 끊어지고 말았다. 자네는? 라이온은 부자연스러운 마무리에 의아해하며 별 생각 없이 식스의 말꼬리를 잡아 되풀이했다. 그것을 재촉으로 받아들인 식스는 침착함을 되찾는 대신 눈에 띌 정도로 당황했다. 어느새 그의 얼굴이 불콰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적포도주는, 매우 순한 술이었다.

  갑판장이지, 식스는 중얼거리듯이 대답하고는 라이온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떨어뜨렸다. 대답을 경청하던 라이온이 , 그런 긴요한 사실을 제게 함부로 알려주셔도 되는 겁니까?’하고 깐족거려도 되받아치지 못했다. 식스는 갑판장이라는 지위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대신 포도주를 택했다. 고지식한 그는 차마 진심을 말할 수도 거짓말을 할 수도 없는 난관에 부딪쳐 있었다. 라이온 역시 더는 캐묻지 않았다. 옆 사람에게는 한 잔의 아량조차 베풀지 않고 혼자 술을 해치우는 식스를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구름이 걷힌 밤하늘에 말간 별빛이 부유했다. 피로를 무릅쓰고 불침번을 서고 있는 사람들에게 큰 위안이 되는 풍경이었다. 내일은, 항해하기에 좋은 날씨이리라. 식스는 거의 바닥을 보이는 술병을 옆으로 치워두고 라이온을 향해 돌아앉았다. 굳은 피 탓에 살갗에 들러붙은 셔츠를 걷어내자 은은한 등불 아래로 엉성하게 묶인 붕대가 드러났다. 짧게 혀를 차는 소리에는 분명 힐책의 의미가 강했지만 라이온은 씩 웃을 뿐 변명하지 않았다.

식스는 미리 준비해두었던 새 붕대를 꺼내 조심스레 라이온의 상처를 감쌌다. 은근히 치미는 아픔에 식스와 닮은  꼴로 미간에 골을 만들던 라이온이 문득 하늘에 산개한 별들을 바라보았다. 태고로부터 전해져오는 풍경이 십수 년의 시간을 우습게 만들었다. 다른 때, 다른 곳에서 지켜본 별과 서글플 정도로 다르지 않았다. 그는 뒤로 젖혔던 고개를 내려, 식스의 어깨에 이마를 댔다. 식스는 움칫 몸을 굳혔다 풀며 어정쩡한 투로 물었다.

 

뭐냐?”

그냥, 아파서요.”

아까는 괜찮다며?”

다시 생각해보고 안 괜찮기로 했습니다.”

 

  붕대를 꽉 당기거나 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식스가 얼마나 인내를 발휘하는 중인지 추측할 만 했다. 무어라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 뿐 정성스러운 손길에는 별 변화가 없었다. 식스, 귓가에서 들려오는 부름에 식스는 그제야 못마땅한 소리로 불평했다. 일항사다, 일항사. 왜 또. 라이온은 눈을 감은 상태로 입술만 떼어 읊조리듯 말했다. 고맙습니다. 이어지는 식스의 횡설수설-주정도 적당히, , 술은 내가 다 마셨군. 잠꼬대도 어련히-을 들으며 가볍게 웃은 그는 이후로도 몇 마디 더 했다고 생각했지만 그 소리는 자신조차도 듣지 못했다. 깊은 밤에 숨을 죽인 파도와 바람의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잠이 찾아오기 무척 좋은 때였다.

  어느새 깔끔하게 동여맨 붕대 위로 단단한 매듭이 생겼다. 더 손댈 필요는 없을 것이었다. 치료가 끝나고도 여전히 라이온의 고개는 식스의 어깨를 누르고 있었다. 고른 숨소리가 들릴 때마다 몸이 살짝 들썩였다. 식스는 라이온을 흔들어 깨우려다가 곧 그만두고, 그의 등에 손을 얹었다. 적요한 바다 위에서 자유호는 요람처럼 부드럽게 흔들렸다. 길었던 하루가 어김없이 지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