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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쳐+데스필드] 패스의 중간에서

 

아무래도 늦은 감이 있었지만 데스필드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에게 열렬히 증언했던 핸솔 추기경이 이 사실을 안다면 성직자의 양심 운운하도록 억울해 할 것이다. 정말로 똑같다지 않았소, 하고. 데스필드는 언젠가 항의를 들을 기회가 온다면 서너 번 고개를 끄덕여주리라고 결심했다. 물론 오지 않을 기회에 베푸는 너그러움이었다.

데스필드와 마주한 사내는 빙긋 웃었다. 데스필드는 흐음, 하고 짧게 감회를 표현했다. 그것은 틀이 없는 거울 같았다. 평생 거울에게 속아온 것이 아니라면, 분명 눈앞의 사내는 여태껏 봐온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 그래봐야 거울로는 글렀어. 어딘가 달아놓기도 시원찮고-발 달린 건 용이하지만-본인은 웃을 생각도 없거든. 데스필드는 실없는 생각으로 놀라움을 대신했다. 그의 반응을 찬찬히 살피던 사내가 즐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랜만, 이라고 인사하는 편이 맞을까? 아니면 초면에 실례한다고 양해를 구해야 할까.”

내키는 대로. 둘 다 어폐가 있긴 하지만 비교적 더 우스운 것은 후자구려. 실례라면 더 일찍이 했으니.”

자네가 면박을 줘도 나로서는 할 말이 없군. 내가 제멋대로 군 것이 맞으니까.”

, 참아줄 대금은 되었소. 본인은 똑바로 값을 치룬 일을 뒤늦게 책잡을 만큼 악랄하지 않수다.”

심드렁한 대답에는 상황을 미루어 볼 때 의당 따라와야 할 경계나 긴장이라고는 없었다. 그야말로 앞에 거울을 세워두고 저 혼자 되도 않는 농을 던지는 투였다. 사내는 무성의한 대우에 화를 내는 대신 흥미로운 얼굴로 데스필드를 쳐다보았다.

기괴한 광경이었다. 두 사람의 얼굴은 유사하다는 말로 표현해서는 안 되었다. ‘같다는 말만이 옳을 것이다. 인간으로서는 차마 쓸 수 없는 완전하고 절대적인 개념이 그들 사이에 존재했다. 하나의 핏줄이 가능케 하는 형제, 쌍둥이의 불완전한 유사성과는 달랐다. 완벽한 타인이 완벽한 동일함으로 묶여 있었다. 곧 닿을 거리에서 실감하는 그 불가해한 사실이 두려움을 줄 법 하건만, 두 사람은 못내 태연하기만 했다.

의문과 경탄만으로도 부산스럽게 채워질 줄 알았던 순간이 뜻밖의 침묵으로 무거웠다. 벌쳐는 답변자가 아닌 질문자의 입장에 서게 된 사실에 일종의 감탄을 느끼며 다시금 말을 꺼냈다.

나한테 물어볼 것 없나?”

무슨? 본인은 잘 빠진 미녀가 아니고서야 상대에게 별 궁금증을 느껴본 역사가 없는데. 더군다나 이런 칙칙한 사내에에잇, 외관에다 무슨 말을 했다가는 영락없이 본인 욕을 하는 꼴이라 마뜩찮군. 여하간 그렇소.”

하하, 자네는 참 재밌어. 보통은 저와 꼭 닮은, 심지어는 직업도 같은 사람이 어디서 살고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한 번쯤 보고 싶기 마련일 텐데.”

글쎄올시다, 운명론이나 뭐 그런 걸 말하는 거요? 같은 얼굴에 같은 패스파인더라니, 운명론에 따르자면 이미 일생의 반려쯤은 되었겠는데. 본인은 그런 낭만주의에는 별 관심 없소.”

데스필드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발끝에 걸린 돌멩이를 힘주어 찼다. 바위에 부딪친 돌멩이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바스러졌다. 태평하기 짝이 없던 그의 얼굴에 일순 영문을 알 수 없는 그늘이 드리웠다. 그는 조각 난 돌멩이에 시선을 둔 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한 번쯤 올 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지만, 솔직한 말로 본인은 당신을 별로 만나고 싶지 않았소.”

그거 서운하군. 왜지?”

본인은 목숨에 꽤 애정이 있는 편이지. 죽고 싶지 않거든.”

험악한 말에 따를 반응으로는 당최 어울리지 않는, 경쾌한 웃음소리가 허공에 흩어졌다. 한바탕 유쾌한 웃음을 터뜨린 벌쳐가 흐트러진 머리를 가다듬으며 물었다.

운명은 안 믿어도 속설은 믿나? 같은 얼굴을 한 사람과 마주치면 죽는다는, 뭐 그런 이야기겠지?”

아주 그럴싸하지 않소.”

심각한 투로 대꾸하는 데스필드를 보며 벌쳐는 킥킥 웃었다.

그는 한가롭게 팔을 쭉 내뻗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행을 떠나기 좋은 쾌청한 날씨였다. 그의 복장은 당장이라도 먼 길을 나설 듯 가뿐하고 튼튼했다. 누가 보아도 지적할 데 없이 여행자의 모습이었다. 다만, 아무데도 짐은 없었다. 그것은 데스필드도 마찬가지였다. 패스파인더들의 만남이라 말하기도 우스꽝스럽게, 두 사람은 철저히 빈손이었다. 벌쳐는 데스필드를 흘끔 훑어보았다.

짐이 없는 것을 보아하니 패신저가 나인 줄은 진작 눈치 챈 모양인데, 그렇게 불안하다면 이 자리에 나오지 않는 것이 아귀가 맞지 않나. 무슨 연유로 이 우스꽝스러운 장난에 응했는지 궁금하군.”

, 들어나 보자는 거지요.”

호기심이라, 목숨을 걸 정도로?”

나름 믿는 구석도 있고.”

믿는 구석? 벌쳐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다시 세심하게 데스필드를 바라보았지만 딱히 위협적인 부분은 없었다. 함정은 당초에 염두에 두지 않았다. 패스파인더들의 만남에 함정이란 아무리 잘 짜인 것이라 하더라도 패스에서 벗어나므로 무용지물이었다. 물론 데스필드의 허리춤에 걸린 스완대거는 거창한 무장에 못지않은 대단한 무기였으나, 그것을 내준 장본인이 벌쳐였으므로 두 사람 모두 허튼 고려는 하지 않았다. 결국 벌쳐는 여전히 무신경한 얼굴을 하고 있는 데스필드에게 답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무엇인지 궁금한데. 나로서는 영 짐작할 수 없군.”

신부님 당신이 곧 올 거요. 미리 이 곳을 일러두었거든.”

단순히 들어서는 맥락에서 벗어나는 영 뜬금없는 소리였다. 하지만 벌쳐는 데스필드가 충실하게 대답했다고 느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파킨슨 신부님의 핸드건 말인가? 아니면 단순히 목격자를 말하는 건가?”

그제야 고개를 돌린 데스필드는 이상하다는 얼굴로 벌쳐를 쳐다보았다. 조롱 같기도, 불만 같기도 한 종잡을 수 없는 표정을 짓고서 그는 투덜거리듯이 말했다.

악마 당신에게 신부님 당신은 전통적인 천적 아니었소? 본인이 잘못 알고 있다면 미안하지만 빨리 알려주쇼. 지금이라도 줄행랑을 놓아야겠으니.”

여태껏 느긋한 태도로 일관하던 벌쳐가 얼굴을 굳혔다. 그는 입을 벌렸다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다시 닫았다. 거북한 침묵이 흘렀다. 데스필드는 여전히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앞으로 바뀔 상황에 새삼 긴장을 하지도, 상대의 허를 찔렀다는 사실에 기세를 올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 태연자약함에 페이스가 휘말린 벌쳐는 항복하는 기분으로 맥없이 웃으며 다시 입을 뗐다.

못 당하겠군. 악마라, 그냥 욕을 하려 했거나 짚어본 것 같지는 않고. 왜 그렇게 생각했지?”

낭만주의에 관심 없다 하지 않았수. 본인 얼굴을 한 패스파인더가 돌아다닌다는 말을 듣고 본인 어머니의 비밀을 의심하는 편이 맞겠소, 악마 당신의 장난을 떠올리는 편이 맞겠소?”

효자로군.”

잘 알고 말고의 문제일 뿐이오.”

벌쳐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이 무슨 신호라도 된 양, 마침 바람이 몰아쳤다. 데스필드는 규칙 없이 갈라져 들썩이는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 무수한 깃털이 흩날리는 듯한 잔상을 보았다. 그때 바람소리와 구분되지 않을 만큼 깊고 웅장한, 인간의 성대를 거쳐서는 결코 내지 못할 것 같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울렸다.

자네의 혜안에 경의를 표하네.”

그 소리는 아주 가깝게도 아주 멀게도 들렸다. 방향도 거리도 가늠할 수 없는 소리를 들으며 데스필드는 조심스럽게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파킨슨이 어서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것 외에는 그것이 고작이었다. 그는 속에서 피어오르는 희미한 의혹을 잠식시키기 위해 자신에게 대답했다. 왜 나왔느냐고? 본인은 본인의 패스를 믿기 때문이지. 하지만 악마 당신이 본인의 패스를 존중해 주리라고는 생각지 않아. 설령 당신한테 죽어도, 본인은 본인의 패스로 죽는 거요. 그러면 된 거 아니오.

당신이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

마침내 바람이 가라앉을 무렵, 데스필드는 아득하게 이해한다는 소리를 들은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것이 진짜인지 궁리해보기도 전에 단단한 정적이 돌아왔다. 다시 바라본 벌쳐는 별 다를 바 없는 인간의 모습이었다. 어디에도 깃털 따위는 없었다. 뒤따라 흘러나온 목소리 역시 지극히 평범한 인간의 것이었다.

아무튼 안심해도 좋아. 나는 자네를 해치려고 온 게 아니니. 단지 인사를 하고 싶었을 뿐이야. 자네 덕분에 이 세상을 다니기 꽤나 수월했거든. 자넨 뛰어난 패스파인더야.”

제일 뛰어나지.”

하하, 실례했군. 제일 뛰어난 패스파인더야. 얼굴과 능력을 빌려 썼으면 인사라도 하는 게 도리 아니겠나? , 악마에게 도리라니 터무니없는 소리 말라는 얼굴이군. 맞아, 자네는 이번에도 현명하게 판단했어. 난 거짓말을 관장하는 하이마스터지.”

스완대거를 쥔 손은 비록 하얗게 질려 있었으나 아직도 말투만은 평안했다. 안정을 되찾은 벌쳐 역시 느긋하게 웃으며 데스필드의 말에 수긍했다.

그러나 싱겁게도, 이건 진짜야. 벨로린이 있었다면 증명이라도 해주었을 텐데 아쉽군.”

벨로린, 벌쳐는 그 이름을 어디에서 들었는지 이내 기억해 냈다. 도스 계곡의 밤, 싱잉플로라들의 노래, 노래의 불꽃, 판데모니엄의 하이마스터 벨로린. 그는 하이마스터 둘에게 가깝게 다가간-심지어 하나는 자기와 긴밀하게 연결을 맺고 있는-자신에게 자랑스러워해야 하는지 잠깐 고민했다. 잠깐의 숙고에도 그는 본인이 아달탄이나 하이낙스와 비슷한 선에 놓일 인물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가 더 깊은 생각에 잠겨들며 신화와 현실의 경계를 흐려놓기 전에, 벌쳐가 말했다.

그럼 자네가 더 불편해하기 전에 이만 헤어지도록 할까. 내 패스는 내가 그을 테니 이번 의뢰는 취소해주게. -만나서 반가웠네.”

벌쳐는 친근하게 손을 내밀었다파킨슨과 스완대거의 능력은 거듭 생각했어도 딱히 인삿말을 준비하지 않았던 데스필드는 어쩔 수 없이 그 손을 살짝 맞잡으며 엉성한 투로 답했다.

좋은 여행길 되쇼.”

자네도.”

벌쳐는 기분 좋게 웃으며 인사했다. 그는 데스필드에게서 등을 돌려 앞에 난 길을 따라 걸어갔다. 가뿐한 걸음은 무척 빨랐지만, 패스파인더라면 으레 저런 걸음으로 걷는 법이었다. 데스필드는 그 걸음에서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없었다. 그저 길을 따라가는 패스파인더의 모습을 보았을 뿐이었다. 조금씩 멀어진 벌쳐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데스필드는 혼자 남겨진 채, 비어있는 길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데스필드는 품속에서 파이프를 꺼내 연초를 채워 넣었다. 손끝은 아주 미미하게 떨린 정도였지만 파이프를 벗어난 가루들은 여지없이 바닥으로 흩어졌다. 그는 느릿하게 떨어지는 연초가루를 한심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래도 이 정도는 의연하지, 청중 없는 변호는 결국 자신만을 위한 게 되었지만 데스필드는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했다. 하이마스터 당신들한테 갈빗대라도 내어줘 본 당신이 아니라면 본인한테 왈가왈부하면 안 되는 거요. 그는 자신의 의견에 동감하는 뜻으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데스필드, 멀리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앞이 아닌 뒤에서였다. 그는 목소리만으로도 상대가 누군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생각보다 늦어진 상대-파킨슨에게 울화라도 터뜨려 볼까 하다가, 영 기력이 나지 않아 그만두었다. 그 사이 파킨슨은 데스필드의 곁에 다다랐다. 제법 먼 길을 걸어온 듯 지친 기색이 역력한 그가 입술을 비죽였다.

뭘 여기까지 불러내고 그러냐. 뜬금없이어라, 무슨 일 있었냐? 안색이 창백한데?”

불평이 다 끝나기도 전에 놀란 얼굴로 묻는 파킨슨을 보며 데스필드는 진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신부님 당신, 축복 좀 해주쇼.”

패달라고?”

도대체 축복의 정의가 어떻게 되어먹은 거요! 기도 좀 해달라니까!”

파킨슨은 질겁한 얼굴로 급히 성호를 그었다. 이것이 절대 자신을 위한 기도가 아님을 안 데스필드는 억울한 표정으로 불량 신부를 되풀이했고, 하마터면 파킨슨이 정의하는 축복을 받을 뻔하였다. 주먹을 문지르던 파킨슨이 의아쩍은 얼굴로 데스필드에게 물었다.

네 녀석이 기도라니? 정말로 무슨 일 있었냐?”

본인은 이제 지옥에 가면 안 되는 몸이 되었소. 아무래도 회개해야겠군.”

지옥? 악마의 사생아에게는 고향인 셈 아닌가?”

이이이익, 자꾸 이러기요!”

알았다, 농담은 그만하지. 아무튼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만나면 곤란한 당신이 생겼거든.”

지옥에? 어떻게 발품을 팔면 지옥에까지 적이 생기냐.”

핀잔보다는 감탄에 가까운 이야기를 들으며 데스필드 역시 속으로 내심 동의했다. 정말로 지옥에서 만난다면, 그땐 당신의 손에 찢어발겨지겠지. 그것이 지옥의 주인이 할 일일 테니. 나는 당신의 거짓말을 기억하겠소. 그러나 그는 파킨슨의 말을 인정하거나 상황을 부연하는 대신 대신 콧대를 세우며 방자하게 대꾸했다.

본인은 최고의 패스파인더 아니오. 아무래도 패스가 좀 길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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