펭귄님 @boxpg 썰 기반으로 드리는 글, 애프터 주의.
편안하다고도, 불편하다고도 단정할 수 없었으나 묘하게 생경한 느낌인 것만은 분명했다. 식스는 눈조차 뜨지 않은 상태에서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미간을 찌푸린 채 몸을 뒤척이자 얕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흡사 누군가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다음 돌을 매단 채 바다에 던져진 느낌이었다. 그는 산산조각날듯 지끈거리는 머릿속을 뒤진 끝에 간신히 간밤에 조우한 주적(主敵)의 정체를 찾아내었다.
술.
지독한 숙취였다.
달리 해명할 필요도 없는 흔해빠진 이유였으나, 엄격한 사내 식스에게는 과장을 보태어 악마의 대죄 못지 않은 것이었다. 그는 혼란한 정신을 모아 힘껏 좌절했다. 눈을 뜰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눈꺼풀 위로 비치는 빛의 밝기만으로도 이미 일어날 시간을 제법 넘겼음을 알 수 있었다. 자유호의 일항사로서, 선장인 키 드레이번의 임무를 보좌하는 입장에서 용서할 수 없는 태만이라고 그는 진심으로 스스로를 비난했다. 설령 키가 용인한다해도, 과음도, 숙취도, 그리고.
식스는 허리께에서 느껴지는 뻐근한 통증에 입술을 깨물었다. 어제 이른 오후 무렵 약탈한 귀족의 상선에는 진귀한 술이 여럿 실려 있었다. 규율이 엄격한 노스윈드는 다함께 모여 떠들썩하게 승전보를 울리는 대신 몇 명씩 술을 나누어 마시며 조용한 휴식을 취했다. 식스는 가장 좋은 술을 남겨 선장실로 갔고, 키는 몸을 돌리려는 그를 불러세워 함께 마실 것을 권했다. 그렇게 시작된 술자리였다. 그 술자리가 종내에 무엇으로 이어질지, 식스는 잘 알고 있었다. 전례라면 이미 충분했다.
그럼에도 그가 새삼스럽게 얼굴을 붉힌 것은 물론 그의 천성 때문이기도 했지만 평소보다 과했던 술의 탓 또한 컸다. 술로 흐려진 불명확한 기억은 간밤의 그의 모습을 가장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부풀렸다. 키에게 했을지 모르는 모종의 실수들이 그를 아찔하게 만들었다. 더욱이 술이 아니었다면 그는 스스로를 만족시킬 엄격한 방식을 고수해, 키의 잠을 깨우지 않고 일찍이 침상을 정리하여 제 방으로 돌아온 다음 조금 더 피곤한 아침을 맞았을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마침내 식스는 눈을 떴다. 그는 아연하게 천장을 바라보았다. 육지의 건물과 달리 선실은 그 주인의 지위를 별로 고려하지 않아 별다른 차이가 없었지만, 적어도 제 방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가 제 몸을 받친 침대의 감촉을 마저 확인하고 하나의 결론을 도출했을 때, 마치 대답처럼 나직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얼어붙다시피 한 채로 눈을 깜빡였다. 맞닿은 몸에 전해지는 온기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평정을 잃은 머리는 쉽사리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우스운 노릇이었다. 그는 어젯밤 꽤 오래도록 그 온기를 느꼈다. 그러나 아침이 되자 그는 직면한 상황에 공포밖에 느낄 수 없었다.
곁에 누운 키는 아직 깨는 기색이 아니었다. 식스만큼 키로서도 드문 늦잠이었다. 식스는 조심스럽게 상체를 일으켰다. 아무런 규칙성도 없이 바닥을 나뒹구는 술병은 눈으로만 헤아려도 여섯 개는 되었다. 어떻게 비웠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 곁에 옷가지들이 구겨져 있었다. 기척 없이 침대를 빠져나가 옷을 꿰어 입고 선장실을 빠져나가면, 아니 그 전에 침대 정리는. 그는 미처 순서를 정하지 못하고 초조한 심정으로 몸을 먼저 움직였다. 역시나 신중한 동작이었지만 평소보다는 분명 부주의한 감이 있었다.
"일항사."
식스는 헛숨을 삼켰다. 어느새 눈을 뜬 키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키의 얼굴은 약간 피로해보였으나 그 뿐, 술기운도 졸음기도 없이 뚜렷했다. 방금 깨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식스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술을 들썩였다. 열기가 한결 짙게 올라온 얼굴이 눈에 띄게 붉었다. 키는 시트를 그러쥔 채 어쩔 줄 몰라하는 식스를 지켜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엄한 질책이라도 들은 듯, 그제야 식스는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선장님. 어서 정리하겠습니다."
"항로에 문제가 있나."
"예?"
"당장 서두를 이유가 특별히 있냐고 물었다. 선장인 나도 모르는."
"아, 아뇨, 아시다시피, 항로도 안전하고, 어제의 전투도 있었으니 오늘은 우려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면 조금 더 누워 있어도 되겠군."
"예, 더 쉬십시오. 문제가 있다면 바로 보고하겠습니다."
식스는 다급히 몸을 일으키려다가 순간 중심을 잃고 휘청했다. 숙취만을 생각하던 그는 제 손목이 단단히 붙들렸다는 사실을 조금 늦게 알았다. 키는 여전히 몸을 눕힌 채로 팔만 뻗어 식스를 붙잡았다. 장난이란 키와 별로 어울리는 단어가 아니었다. 키의 단호한 얼굴을 보지 않고도 식스는 키가 '명령'했음을 알았다. 그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키를 내려다보았다. 키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말했다.
"항상 그러더군. 도망치기라도 하는 듯이."
"서, 선장님께서 좀더 쉬시도록..."
"내가 정말로 잠들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식스는 눈을 크게 떴다. 키와 함께 잠자리에 들 때마다 키를 깨우지 않는 방법을 고심하는 것으로 자신의 행위를 용납하고 타협해온 그에게는 더 이상 변명할 도리가 없는 말이었다. 그는 낭패스러운 얼굴로 바닥에 널린 옷가지를 바라보았다. 정과, 추문과, 주제 따위를 필사적으로 생각해보았으나 키가 받아들일 만한 문장은 나오지 않았다. 식스는 자신이 끝끝내 키를 납득시키지 못할 것을 깨달았다. 언제나 스스로를 납득시키지 못했던 것처럼.
"누워라."
"선장님."
"두 번 말하게 할 셈인가. 너답지 않군."
식스는 굳었던 몸에서 힘을 뺐다. 변화를 느낀 키가 붙잡았던 손목을 놔주었다. 잠깐동안 잡혔던 손목에는 붉은 손자국이 선연했다. 마음이 동했다기보다는 '명령을 받들었다'고 해석해야 맞겠지만, 키도 더이상은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처음보다 더욱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몸을 눕히는 식스에게 잠자코 곁을 내주었을 뿐이었다. 한결 선명해진 햇빛이 그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자유호의 아침은 아주 조금 더 늦어질 예정이었다.
'PR' 카테고리의 다른 글
9/25 썰계 백업 (0) | 2016.09.25 |
---|---|
폴라리스랩소디 낙서정리 (0) | 2015.11.07 |
[라이온식스] 거짓말 (0) | 2015.07.31 |
[폴랩현대AU] 노스윈드의 어떤 하루 (0) | 2015.07.28 |
폴라리스 랩소디 캐릭터 소트 (0) | 2015.01.18 |